오래전 전방에서 포성과 더불어 시작됐던 저의 군 생활 내내 함께했던 ‘쿵’ ‘쿵’ 소리를 기억합니다. 가을이면 전국에서 몰려온 부대 가운데 우리가 최고 성적을 거둬야 한다는 일념으로 구슬땀을 흘리며 동료들과 함께 계곡과 벌판을 누볐습니다. 그땐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이게 상대방에게 엄청난 피해를 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지구 반대편 우크라이나에서 울리는 포성은 실제 상황입니다. 건물이 무너지고, 사람의 생명이 사라지고,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와 고통이 그곳에 있습니다. 사실은 우리도 유사한 상태에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수십 년 전에 똑같은 일을 겪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잠재적인 위협과 공포 상황에 놓여 있는 셈이니까요.
구약시대 이스라엘과 유대는 어땠습니까. 이미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멸망을 당했고, 홀로 남은 유대가 강대국 앗수르, 애굽, 바빌론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때 유대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무너진 모습을 알고 있었습니다. 침략의 공포를 실감하고 있었을 겁니다. 특이한 점은 공포와 동시에 뭔가 믿는 것도 있었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저들을 단칼에 무찌르고 강대국들이 오히려 자기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전쟁, 멸망에 대한 공포와 승리, 지배 등의 탐욕이 같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 공포와 탐욕이 우리의 모습 아닐까요. 끝없이 탐욕을 추구하며 예수님까지 거기 끌어들이다가 모든 것이 여의치 않아 결국 공포에 직면하면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게 우리의 모습 아닌가요. 다가올 멸망을 눈치채지 못한 채 이웃으로부터 무언가를 더 빼앗는 데 혈안이 돼 있던 아모스 선지자 시대 사람들, 우리가 그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이런 말을 덧붙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심판과 사망이 아니라 믿음으로 영생과 생명에 이른다는 말씀이지요.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답은 믿음, 생명, 구원, 영생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에게도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 말씀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 아닙니까.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13~14)
포성이 울리는 우크라이나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사람들. 언제 있을지 모를 바빌론의 침략 위협에 떨고 있는 유대 사람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이런저런 근심 가운데 고달픈 나날을 보내야만 하는 우리.
이런 인간들에게 오늘도 생명의 물을 받아먹으라고 외치시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힘이 아직 부족합니까. 더 큰 힘이 있어야 마음이 놓입니까. 내가 힘써 만든 모래성이 어느 날 작은 파도에 무너질까 두렵습니까. 우리들의 세상이 갑자기 파괴될까 봐 겁이 납니까.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시는 생명의 물을 받아 마셔야 할 것입니다.
이덕수 길벗교회 목사
◇길벗교회는 한림대 교수를 역임하고 웨이크사이버신학원에서 공부한 이덕수 목사가 개척한 곳으로, 믿음은 나를 변화시키고 나는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으로 항상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