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475~1564)의 ‘아담의 창조’(아래 사진)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이미지다. 구부러진 왼손을 힘없이 내미는 아담과 사력을 다해 오른손을 뻗어 검지를 내미는 신의 모습은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다.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중 하나인 이 그림엔 인간의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형상(창 1:27)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담고 있다. 신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는 존재이며, 손가락이 맞닿는 순간 생명이 전해져 아담의 창조가 완성되리란 기대가 들어 있다.
김학철 연세대 학부대학 기독교교양학 교수는 신간 ‘성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입 맞출 때’(비아)에서 “미켈란젤로가 생각한 신의 형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새로운 주장은 미술계나 신학계가 아니라 의학계에서 제기됐다”고 소개한다. 의사인 프랭크 메쉬버거는 미국의학협회보(AMA)에 미켈란젤로의 신과 망토 그리고 그 안의 인물 배치가 인간의 뇌를 해부했을 때의 단면도와 일치한다고 밝혔다.
그림 속 오른쪽 신의 영역에서 분홍빛 망토는 뇌의 외형, 푸른 천은 뇌간, 신이 있는 부분은 전두엽, 신의 오른팔 아래 슬픈 얼굴의 천사는 뇌를 양전자 단층촬영(PET)할 때 슬픈 생각을 하면 반응하는 영역과 일치한다고 전한다. 해부학의 대가이기도 했던 미켈란젤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뇌와 관련된 이성이라고 생각하고 이 그림을 그렸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신의 손가락이 인간과 닿지 않았는데도 아담이 살아있는 건 생명의 전극이 시냅스 간극을 통해 전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고 말한다.
지난 9일 서울 용산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 교수는 ‘성서의 시각적 읽기’를 강조했다. 성서학을 전공한 그는 “독자가 성서 본문과 성서 이미지를 동시에 놓고 성서 본문으로 성서 이미지를 감상하고 또 성서 이미지를 통해 성서 본문을 읽을 때 일어나는 교차적 이해와 성서 메시지의 예술적 표현을 목적으로 하는 읽기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쉽게 말해 성서로 그림을 읽고, 그림으로 성서를 다시 들여다보자는 뜻이다. 미켈란젤로 그림을 통해 창세기 앞부분을 다시 읽고, 천지창조 자체가 혼돈과 허무와 흑암을 벗어나 생존과 번영을 향한 간절함이 담긴 이야기임을 거듭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김 교수는 “예술 없는 종교와 종교 없는 예술, 둘 다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각적 이미지가 주는 아름다움은 쏙 빼고 윤리와 교리만 남긴 종교는 정죄함만 가득할 뿐이며, 종교 없는 예술 또한 작가로 하여금 초월적 가치를 전하지 못하게 만들어 나에게로만 침잠하는 자폐의 무한루프로 찌그러트릴 뿐이라고 지적했다. 우상 숭배를 우려해 예배당에 십자가마저 걸면 안 된다고 지적하는 일부 교단의 완고함, 예술계의 경우 욕망과 자아를 말하면 인정하고 기독교를 언급하면 배척하는 일부의 완악한 태도를 꼬집은 발언이다.
한국교회가 지나치게 듣는 것에만 치중해온 점을 인정하고, 이젠 들여다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는 오감, 그중에서도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신앙의 지경을 넓히는 일이 필요하다고 김 교수는 강조했다. 책은 마태복음 20장 ‘포도원 품꾼의 비유’를 그린 패트릭 페에르츠 드 베의 작품,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을 새롭게 그린 지거 쾨더의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영국의 시각예술가 프레데릭 구달의 ‘하갈과 이스마엘’ 등 십여 점의 명화를 통해 성서를 더욱 깊이 있게 이해하고 각자의 인생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더욱 아름답게 가꾸라고 권한다. 믿지 않는 이들을 고려해 공동번역 성서의 용어를 사용한 김 교수는 “한국의 젊은 화가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성서 이야기도 다뤄 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