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일 기자의 미션 라떼] ‘케냐인 목사’는 교회를 세울 수 있을까

임스 게일(뒷줄 가운데 양복입은 사람) 선교사가 1900년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뒤 교인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국민일보DB




1885년은 우리나라 선교 역사의 원년과도 같은 해다. 137년 전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에는 서구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은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며 복음을 심었다.

교세는 빠르게 성장했다. ‘현대판 바울’로 불렸던 존 모트 선교사는 1907년 2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한 뒤 “한국이 동양의 기독교 국가,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을 정도였다.

초창기 세워진 교회 중 대부분이 여전히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다. 정동제일교회는 1885년 설립됐으며 새문안교회는 1887년 역사의 첫 장을 썼다. 1894년에는 연동교회가 세워졌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이들 교회는 100년이 훌쩍 넘는 기간 동안 복음의 증인으로 살았다. 이들 교회는 헨리 아펜젤러와 호러스 언더우드, 사무엘 무어 같은 선교사들이 각각 설립했다.

한 세기를 관통하는 선교의 장을 열었던 선교사들은 모두 백인이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1865년 남북전쟁은 끝났지만 미국 주류 사회는 백인들의 전유물이었다. 흑인들의 일상은 날 선 차별에 내몰렸다. 이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건 남북전쟁이 끝난 뒤 무려 100년이 지난 1965년의 일이었다. 다른 나라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흑인 선교사가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백인 중심의 서구교회들은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선교사 대회를 열었다. 당시 대회는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서구교회들이 당대에 완수할 수 있다는 ‘선교적 자신감’ 위에서 진행됐다. 하지만 이런 자신감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당대는커녕 1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지상명령이 완수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기독교 국가들이 대거 참전했던 1914년과 1939년의 1·2차 세계대전은 서구교회에 깊은 좌절을 안겼다. 참혹했던 전쟁이 할퀸 상처는 서구 기독교의 쇠락을 앞당겼다. 복음이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절망의 그림자가 1910년의 자신감을 압도한 것도 사실이다.

북반구 교회로 대변되던 백인들의 교회가 쥐었던 주도권은 한 세기 동안 남반구로 옮겨졌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남아메리카 교회의 성장세가 가파르다. 선교의 새로운 2세기는 이들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이 이끌고 있다.

남반구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들은 이미 전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고, 드러나지는 않아도 우리나라에서 사역하는 이들도 있다.

영국 연합개혁교회(URC) 소속 목회자의 절반이 영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유색 인종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기독교 종주국인 영국의 교회가 자신들의 앞마당을 유색 인종들에게 내준 셈이다. 미국과 호주 교회의 형편도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은 다양성에 대한 인정으로 평가된다. 배타적이지 않고 통합과 소통, 하나님나라 확장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한 동반자 선교로 설명되기도 한다.

우리 사정은 어떨까. 남반구 교회 출신 목회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서구교회에서는 상식처럼 굳어진 남반구 출신 목회자의 사역을 과연 포용할 수 있을까. ‘케냐인 크리스털 목사’와 ‘필리핀인 산토스 목사’가 사역하는 지역교회는 과연 생길 수 있을까.

배타적이라는 비난에 놓인 한국교회가 변화하는 복음의 지형 속에서 소통하고 화합하는 새로운 선교의 여정을 걸어야 할 때다. 모두를 품는 교회의 미래를 꿈꾼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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