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얼마나 미워해 보았습니까. 또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해보았습니까. 이런 질문은 흉측한 것이 아니라 모두 살아 있는 질문입니다. 만약 그대가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감정을 가져 본 적이 없다면 그대의 신앙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대 영혼의 가장 소중하고 순수한 덩어리를 그분의 발 앞에 깨트려 본 적도 없고 그대의 눈물과 머리털로 그분의 발을 닦아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한계까지 가본 사람의 내력은 모두 비슷합니다. 삶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가운데서(창 1:2) 폐부를 뚫고 토해내는 마지막 호흡까지도 망설임 없이 그분께 드린 후 그 바닥에 엎드러졌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시간에 ‘질문’을 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대답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말’의 응답이 아니라 ‘야훼의 얼굴’입니다. 욥기가 일깨워 주는 하나님의 대답은, ‘A’ 또는 ‘B’ 같은 명쾌한 선택들이 아닙니다. ‘Α(알파)’와 ‘Ω(오메가)’이신 그분의 존재와 그분이 존재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이 당면한 구겨진 삶의 의문들은 마법같이 이해됩니다.
칼 야스퍼스는 철학의 과제를 ‘초월자의 암호를 해독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천으로 널려 있는 신의 암호를 해독할 때 삶의 아픔은 전능한 신의 지문이 되어 사랑으로 현현합니다. 의미를 만날 때 우리는 모두 욥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몸을 긁었던 기왓장을 버리고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것입니다. 성경이 제시한 마법 같은 광경을 동경한다면 그대가 선지자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욥기 42장의 공간은 그런 한장(旱狀)입니다. 가문 것(旱)과 형상화된 것(狀)이 한밭에 적나라하게 들어 있는 한장입니다. 욥기 마흔두 장의 열입곱 구절은 욥의 살아있는 질문과 살아 있는 하나님의 대답이 만나는 공간입니다. 분명 그것은 ‘신앙의 실존’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낭만적이거나 고요하거나 거룩한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실존은 나를 유리같이 깨부수고 곱게 가루가 되어서라도 그분을 신뢰하는 내력입니다. 왜냐면 결국 그분은 그대보다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분은 고난에 녹아내리는 그대보다 더 좋으신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욥의 고난과 질문은 그런 이들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께 전적인 사람들. 그런 사랑과 충성을 주께 드려도 바닥 같은 현실을 사는 사람들. 아름다운 믿음과 상관없이 괴상한 현실에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신앙의 추구와 상관없이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사람들. 믿음으로 살지만, 고운 모양이 하나도 없는 사람들 말입니다.
조금 더 쉽게 표현해 보자면,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지만 도무지 잘 안 되는 그대와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매일 매일 연습해도 단 한 번의 무대조차 주어지지 않는 그대와 같은 사연들 말입니다. 모두 하나님 앞에서 필요한 사람입니다.
저는 한편의 설교를 통해 그대를 위로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대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아직 ‘알파’와 ‘오메가’이신 그분의 존재와 그분의 존재 방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라고. 그대의 ‘무명(無名)’은 사실 잘 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대의 신앙은 선지자들같이 비범할 수 있고, 선지자들의 신앙은 그대처럼 괴로웠다고. 그래서 거의 다 왔다고. 욥도 꼭 그러했다고.
김일환 전도사(우리가본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인 우리가본교회는 우리가 성경에서 보고 배우고 그리워하는 교회의 모습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2020년 서울 영등포구에서 개척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