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부의 삶이 시작된 건 1995년이었다. 매달 얼마씩이라도 장애인을 돕는다면 기쁨이 크지 않겠느냐는 어머니의 권유에 마음이 동했다. 정승아(53·여)씨는 매달 5만원을 내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다시 내놓은 제안은 한 단계 더 나아가 있었다. 장애인 부모를 둔 학생 1명을 도맡아 지원해보라는 것. 1년간 감당해야 할 학비와 학용품, 교재 구입 비용 등은 100만원 수준이었다. 당시 군의관으로 일하던 남편 조국형(58)씨의 월급과 비슷한 금액이었지만 정씨는 남편과 뜻을 모아 기꺼운 마음으로 한 학생을 돕기로 했다.
이 일은 정씨 부부가 이후 벌이게 된 기부 레이스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다. 부부가 지금까지 기부금으로 내놓은 돈은 5억원에 달한다. 최근 경기도 성남 만나교회(김병삼 목사)에서 만난 정씨는 이렇게 말했다.
“참 신기해요. 많은 걸 나눴는데 저희가 가진 뭔가가 줄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기부하지 않는 건 (우리의 잇속을 위해) 하나님의 돈에 손을 대는 거라고.”
부부의 기부금이 흘러간 곳
국민일보가 ㈔월드휴먼브리지와 벌이는 ‘세상을 바꾸는 아름다운 기부’(세아기) 캠페인은 유산으로 남길 재산 일부를 생전에 미리 사회를 위해 내놓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자선에 대한 크리스천의 인식을 제고하게 만들자는 것도 캠페인의 취지 중 하나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정씨 부부는 세아기 캠페인에 딱 들어맞는 사례이면서 이 캠페인의 조력자이기도 하다. 만나교회 권사인 두 부부는 3년간 매달 교회에 300만원을 기탁했다. 이렇게 모인 1억원은 지난해 월드휴먼브리지로 향했고, 돈의 일부는 월드휴먼브리지가 만든 유산 기부 센터인 브리지소사이어티로 흘러갔다. 브리지소사이어티는 기부금을 종잣돈 삼아 최근 기독교 자선 교육 교재인 ‘세상을 바꾸는 씨앗’을 펴냈다.
정씨는 국민일보와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책을 처음 봤다. 그는 “너무 기분이 좋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선교라는 게 다양한 형태를 띠는 거잖아요. 특히 중요한 것은 교육을 통한 선교라고 생각해요. 저희 부부가 내놓은 돈이 이렇게 결실을 보니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정씨 부부는 서울 동대문구에 있는 ‘대한민국요양병원’을 운영하면서 꾸준히 수입 일부를 세상을 위해 내놓고 있다. 정씨는 김병삼 목사가 자주 한다는 말을 언급했다.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면 그건 일을 벌이라는 신호다.” 정씨는 “나한테 들리는 가슴의 소리, 그 소리만은 거절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기부의 삶을 살면서 느낀 가장 큰 보람은 무엇이었을까. 이런 물음에 정씨는 언젠가 간 이식 수술을 받은 아이를 위해 내놨던 후원금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상파 방송에 소개된 아이였어요. TV를 통해 아이의 사연을 알게 됐는데 후원금을 보내려고 방송국에 연락하니 이미 수술비가 마련됐다는 거예요. 그런데 입원비를 비롯한 나머지 병원비는 해결된 게 아니더군요. 그 비용을 부담한 뒤 훗날 아이가 건강하게 웃고 있는 걸 봤는데 정말 기쁘더라고요. ‘한 생명을 살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돈의 주인은 하나님
정씨 부부에겐 미국 유학 중인 두 딸이 있다. 아이들은 부모가 수입 일부를 사회를 위해 내놓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심지어 큰딸은 올여름 과외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을 모두 교회 등에 기부하기도 했다. 정씨는 “신앙심이 깊어서 그런 게 아니다. 아이들은 자신이 가진 걸 세상에 내놓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씨와의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그가 가진 물질에 대한 가치관이었다. 그는 돈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생각을 거듭 내비쳤다. 십일조와 관련된 이야기가 대표적이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잖아요. 십일조는 내가 가진 것의 10분의 1만 드리는 건데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 즉 ‘10’을 전부 드리는 게 맞는 거죠. 기부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제가 가진 물질은 저의 것이 아니니까요. 저는 사람들과 하나님 이야기를 나누면서 전도하는 걸 정말 좋아해요. 중년의 크리스천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전도 좀 하라고요(웃음).”
아마도 정씨 부부의 기부는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정씨는 자신들이 벌이는 기부의 결실이 훗날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길 바라고 있을까. 그는 이런 질문에 “아무것도 안 드러났으면 한다”며 미소를 지었다. 어떤 성과를 바라면서 나눔을 실천하는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돈은 제 손을 떠나는 순간 저의 것이 아니고, 제가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도 없어요. 중요한 건 어떤 단체에 내가 돈을 냈느냐는 거예요. 우리 사회엔 기부자의 뜻을 실천할 수 있는 건강하고 정직한 단체가 필요해요. 한국교회가 바로 그런 역할을 했으면 하는 게 저의 희망이에요.”
특별취재팀 조재현 우정민 PD
박지훈 최경식 신지호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