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걷기 묵상은 북한산 자락을 끼고 도는 서울 경전철 우이신설선 화계역에서 출발한다. 1919년 3·1운동의 물밑 조정자인 송암(松巖) 함태영(1873~1964) 목사를 기념하는 송암교회 쪽으로 나와 한 블록만 걸어가면 한신대 신학대학원이다. 언덕 위 캠퍼스 초입 잔디밭에 두 개의 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1945년 서울 용산구 동자동에 문을 연 한신대의 전신, 조선신학교의 정문 지주이다. 1957년 지금의 강북구 수유리 캠퍼스로 이전하며 이 돌기둥을 옮겨왔다.
“내가 죽거든 내 뼈를 우리 조선신학교에 들어가는 문턱에 묻어서 우리 학교직원들이, 그리고 학생들이 내 뼈를 밟고 넘나들게 해 주게.”
두 기둥 사이 발판에 새겨져 있는 만우(晩雨) 송창근(1898~?) 목사의 유언이다. 만우는 6·25전쟁 당시 피란을 거부하고 지금의 서울 성남교회 자리인 동자동 조선신학교를 지키다 납북돼 생을 마감했다. “목사가 되어 민족을 계몽하라”는 스승 이동휘의 말에 독립군이 되길 포기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어간 만우는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 목사직을 사임하고 부산에서 가난한 이들과 머무는 공동체 성빈학사를 세우고 일하다 조신신학교에 합류해 교수와 학장으로 봉직했다. 한신대는 만우의 유언을 초석으로 삼아 교회와 세상을 향해 사랑과 정의를 외치고 있다.
만우에 이어 장공(長空)이다. 장공 김재준(1901~1987) 박사를 기념하는 장공기념관이 대학의 본관이다. 복도에는 장공의 열 가지 좌우명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하나,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둘, 대인 관계에서 의리와 약속을 지킨다. 셋, 최저 생활비 이외에는 소유하지 않는다. 넷, 버린 물건과 버려진 인간에게서 쓸모를 찾는다. 다섯, 그리스도의 교훈을 기준으로 ‘예’와 ‘아니오’를 똑똑하게 말한다. 그다음은 하나님께 맡긴다. 여섯, 평생 학도로서 지낸다. 일곱, 시작한 일은 좀처럼 중단하지 않는다. 여덟, 사건 처리에는 건설적 민주적 질서를 밟는다. 아홉, 산하와 모든 생명을 존중하여 다룬다. 열, 모든 피조물을 사랑으로 배려한다. 존경받는 기독교 어른들이 줄어가는 요즘 하나씩 곱씹어 볼 항목들이다.
늦봄 문익환(1918~1994) 목사의 시비를 뒤로하고 캠퍼스를 나와 북한산둘레길 제3구간을 찾아간다. 걷는 이들의 성지인 서울둘레길 8코스와 겹치는 길이다. 쉼 없이 오르내리는 계단을 감내하며 걷다가 시원한 계곡 물소리가 들릴 즈음 아스팔트길이 나와 영락기도원으로 안내한다. 기도원 앞에서 왼쪽을 택해 5분만 올라가면 유석(維石) 조병옥(1894~1960) 박사의 묘소가 나온다.
조 박사는 충남 천안 출신이다. 그의 부친 조인원과 유관순 열사의 부친 유중권은 나란히 3·1 만세 운동을 주도한 감리교인으로, 조씨는 가슴에 관통상을 입고 치료 후 공주교도소에 수감됐고 유씨는 다른 가족과 함께 현장에서 일본군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독립운동을 뼈에 새긴 조 박사는 선교사들이 세운 공주 영명학교, 평양 숭실학교, 서울 배재학당을 거쳐 미국 컬럼비아대로 유학한 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해방 후 미 군정 아래서 치안책임자를 역임했고 1960년 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다가 유세 도중 병으로 급서했다. 조 박사를 비롯해 북한산 동쪽 면에는 여운형 이시영 김창숙 신익희 손병희 이준 열사 등을 비롯해 한국광복군 합동묘소까지 자리해 있다.
다시 영락기도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고요한 숲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기도하고자 하는 한국교회 성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다.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신앙노선, 청교도적 절제와 근엄의 생활 윤리, 교회연합을 위한 에큐메니컬 정신, 교회의 사회적 양심을 위한 정의 구현 등 영락교회의 4대 신앙 원칙이 새겨진 비석이 오늘도 조용히 성도들을 맞이하고 있다.
글·사진=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