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편집인 월터 배젓이 영국 왕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전제군주로서 왕의 존재 의미는 군림(reign)하고 통치(rule)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군주와 귀족 간 명예혁명이라는 타협의 산물로 입헌군주제를 창설했다. 세습을 거친 왕은 상징적 존재로 군림할 뿐 통치는 선출된 정치가들의 몫이 된 것이다. 며칠 전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도 그랬다. 그러나 통치하지 않았을 뿐인데도 70년 재임 기간 56개 영연방 국가 곳곳에는 여제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다. 지우기 힘든 ‘찌든 때’가 될지 위대한 유산이 될지에 대한 평가는 역사가들의 몫이다. 하지만 하드웨어 측면의 상징물들은 당장 교체될 운명에 처했다. 우선 각종 관공서 깃발에 새겨진 여왕의 상징 문장과 영어 약자 EIIR(Elizabeth Ⅱ Regina)이 아들 찰스 3세 국왕의 것으로 바뀐다. 여왕 얼굴이 새겨진 지폐와 동전 교체도 향후 2년에 걸쳐 진행된다. 특히 동전에 들어갈 찰스 3세의 얼굴은 오른쪽을 바라보는 어머니 얼굴과 달리 왼쪽을 향할 가능성이 크다. 전임자의 통치와 차별화를 꾀하라는 의미에서 생긴 전통에 따른 것이다. 영국 국가 ‘하나님, 여왕을 지켜주소서(God save the Queen)’의 제목과 가사에, 그리고 영연방 국가의 헌법에 표기된 Queen이 모두 King(왕)으로 대체될 것이다.
문제는 여왕 서거를 계기로 터져 나올 지도 모를 군주제 폐지 운동의 향방이다. 영국 정치운동 단체 ‘리퍼블릭’은 가디언지에 공화주의자들이 여왕에 대한 국민적 존경심이 워낙 강해 침묵하고 있지만 머잖아 왕실 장래에 관한 논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군불을 때기 시작했다. 미국 언론들은 식민지 제국 영국에서 군주제의 역할을 비판하는 글을 잇달아 게재하는 등 벌써 재평가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 왕을 원수로 둔 카리브해의 섬나라 앤티가 바부다는 지난 11일 여왕 서거 후 처음으로 공화국 전환을 위해 3년 내 국민투표 실시를 발표해 영연방 이탈 도미노의 신호탄을 쐈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