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 희귀질환 절반 ‘소아 환자’
신생아 선별검사로 조기에 발견
빨리 치료할수록 더 나은 예후
SMA·폼페병 등 급여권 배제
치료 시기 놓치는 사례 부지기수
신생아 선별검사로 조기에 발견
빨리 치료할수록 더 나은 예후
SMA·폼페병 등 급여권 배제
치료 시기 놓치는 사례 부지기수
“유전자 대체 치료제의 등장으로 국내 희귀질환 치료 환경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됐습니다. 이제는 치료를 빠르게 받을 수 있도록 조기 진단이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게 큰 과제입니다.” 서울대병원 채종희(소아청소년과 교수) 희귀질환센터장이 최근 열린 심포지엄에서 강조한 말이다.
채 교수는 지난달 중순 희귀 신경근육질환인 척수성근위축증(SMA)을 앓는 24개월 환아에게 국내 도입된 가장 비싼 약인 졸겐스마를 처음 투여하는 치료를 시도한 바 있다. 운동신경과 관련된 SMN1 유전자의 결핍 혹은 돌연변이로 발생하는 SMA는 근육이 점차 약해져 움직임이나 호흡에 문제가 생기고 생명까지 위협한다. 가장 심각한 1형 SMA는 치료받지 않으면 약 90%가 두살 전에 목숨을 잃는다. 졸겐스마는 병든 SMN1 유전자를 정상 유전자로 대체하는 치료제로, 평생 한 번만 주사 맞으면 획기적인 증상 개선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비급여 시 비용이 20억원에 달하지만 지난달부터 건강보험 적용으로 국내 환자들은 최대 598만원만 내면 돼 부담이 크게 덜어졌다. 채 교수는 “SMA가 ‘신생아 선별검사(Newborn screening·NBS)’에 포함돼 진단이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다면 어린 환자들이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희귀질환의 진단 어려움
희귀질환은 환자 수가 매우 적지만 종류가 다양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만 해도 7700여종에 달한다. 다수의 희귀질환이 유전자 변이에 의해 발생하며 절반은 소아 환자다.
희귀질환자들은 관련 정보나 전문가가 부족하고 복잡한 임상 증상 등으로 인해 진단 단계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2018년 질병관리청 조사에 따르면 희귀질환의 16.4%는 최종 진단을 받기까지 4개 이상 병원을 거치며 ‘진단 방랑’을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와 가족들은 증상이 나타나도 일단 어느 병원으로 가야할 지 판단이 쉽지 않고 전문성이 없는 의료진은 단순 증상만으로 희귀질환을 의심하기가 쉽지 않다. 지난 7월 국회 정책토론회에 나온 한 환자는 “내가 겪고 있는 희귀질환의 병명을 정확히 알기까지 30년 가까이 걸렸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따라서 증상 발현 후 의료진에게 판별을 의지하기 보다 체계적인 진단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희귀질환은 증상이 진행되면 이전으로 되돌리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조기에 진단해 치료할수록 더 나은 예후를 기대할 수 있다. 특히 소아 희귀질환을 가장 빠르게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신생아 선별검사다. 이 검사는 전체 신생아를 대상으로 출생 후 48시간에서 1주일 안에 시행하는데, 아기의 발뒤꿈치에 바늘을 찔러 채취한 혈액을 이용한 유전자 검사법(텐덤매스)이 대표적이다. 증상 발현 전에 질환을 발견·치료함으로써 사망이나 장애를 예방하는 게 목적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집단 선별검사를 위한 10가지 기준을 확립해 놓고 있다. 치료 가능한 경우 안전하고 경제적인 검사법을 통해 스크리닝할 것을 권고한다. 치명적인 희귀질환의 경우 치료제가 있다면 현재 무증상이라 할 지라도 선별검사를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국내 학계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현재 치료제가 개발돼 있으며 조기 발견·치료로 효과가 기대되는 대표적인 희귀질환은 SMA와 리소좀 축적질환(LSD), 중증복합면역결핍증(SCID) 등이다. 그렇지만 이들 질환은 국내 신생아 선별검사 지원 대상에 포함돼 있지 않다. 정부는 2018년 10월부터 50여종의 선천성 대사이상질환에 대한 신생아 선별검사를 건강보험으로 지원하고 있으나 폼페병과 고셔병, 뮤코다당증, 파브리병 같은 리소좀 축적 질환은 빠져 있다. 리소좀은 몸 속에 생성되는 물질을 분해하는 다양한 종류의 효소가 들어있는 세포 소기관이다. 유전자 변이로 인해 특정 효소가 결핍되면 리소좀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고 불순물이 쌓이면서 여러 증상이 나타난다. 나이 들수록 병세가 점차 악화되고 치료하지 않을 경우 조기 사망 등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10만원 검사 비용 ‘부담’
폼페병 등 4개 질환은 급여권에서 배제돼 있다 보니 신생아 선별검사를 받으려면 환자가 10만원가량의 비용을 고스란히 부담해야 한다. 검사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대한신생아스크리닝학회에 따르면 리소좀 축적질환의 신생아 선별검사 건 수는 연간 2000~3000건에 불과했다. 2020년 출생아 수가 약 27만명인 것을 감안할 때 검사 건 수가 1% 안팎에 그치는 것이다.
대한신생아스크리닝학회 총무이사인 이정호 순천향대서울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는 26일 “치료제가 존재하는 희귀질환일수록 조기 진단 및 치료가 중요하다. 하지만 리소좀 축적질환은 일반인에게 생소할뿐 아니라 신생아 선별검사 급여 항목에 들어가지 않아 많은 환우들이 조기에 병을 발견하지 못하고 치료 시기를 놓치는 안타까운 사례가 많다”고 지적했다. 선천적으로 감염에 취약한 중증복합면역결핍증 역시 조기 발견만 하면 유전자 치료제를 적용해 성공적인 치료가 가능하지만 정작 진단에 어려움을 겪는다.
전문가들은 출산율이 계속 낮아지고 있는 상황을 고려할 때 신생아 선별검사 급여화에 드는 정부 예산이 추후 희귀질환자 관리에 필요한 비용 대비 더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정부 차원에서도 진단이 늦어져서 발생하는 심각한 장애에 대한 의료비를 평생 지원하는 것보다 병을 조기에 찾아내 치료받을 수 있게 하는 게 이득이 클 수 있다. 신생아 선별검사 지원 확대를 위한 정부 관계자, 의료진의 관심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리소좀 축적질환의 경우 학회가 4년째 신생아 선별검사 포함을 정부에 촉구하고 있지만 명확한 해답을 듣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 유럽 대만 일본 등 해외 국가들은 신생아 선별검사를 통해 리소좀 축적질환과 SMA 등 치료가 시급한 희귀질환을 빠르게 진단하고 있다. 미국은 2015년 폼페병, 2016년 뮤코다당증(1형)을 선별검사 대상질환군(RUSP)에 포함했고 폼페병은 22개 주, 뮤코다당증은 20개 주에서 지원을 받아 검사가 이뤄지고 있다. 또 47개 주에서 97%의 신생아가 SMA 검사를 받고 있다. 대만에서는 2014년부터 2년간 국가 주도로 신생아 12만명을 검사해 아직 증상을 보이지 않은 SMA 환자 7명을 찾아내기도 했다. 일본도 오사카 등 일부 지역에서 SMA 환아 발굴을 위한 신생아 선별검사를 진행하고 있다. 실제 구마모토현에서는 지난해 2월부터 올해 1월 태어난 신생아 1만3587명을 대상으로 SMA 스크리닝을 실시해 1명의 증상 발현 전 환아를 찾아내 빠르게 졸겐스마를 투여한 바 있다. 현재 이 아이는 혼자 설 수 있게 됐으며 월령에 맞는 정상적인 운동 발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