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 갇혀있는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고 말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이는 비단 바울과 빌립보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나의 삶 속에서도 이미 착한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앞 절인 5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이란 복음을 위한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다는 것은 곧 나로 하여금 복음을 듣고 깨달아 그 복음으로 살게 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한 자라고 말합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 1:7)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2차 선교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 이하를 보면 당시 자색 옷감을 팔던 루디아라는 여인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빌립보 교회의 중심인물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때, 빌립보에 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그를 막으십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바울은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게 됩니다.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행16:9)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방향을 바꿔 마게도냐로 갑니다. 빌립보 성은 마게도냐 지역의 첫 번째 성이고 바로 그곳에서 만난 이가 루디아입니다. 루디아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막지 않으셨다면, 그를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하지 않으셨다면 그녀는 결코 복음을 전해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녀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빌립보 지역에는 귀신 들려서 점을 치는 일을 하는 여종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도 바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귀신이 떠나게 됩니다. 이 귀신 들렸던 여종 역시 빌립보 교회의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후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은 일로 인하여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힙니다. 하지만 그들은 감옥에서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자 옥터가 흔들리고 쇠사슬이 풀려지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두려웠던 간수장은 바울과 실라 앞에 완전히 엎드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들은 대답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간수는 그 날, 그 밤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온 가족들 또한 세례를 받게 합니다. 여러분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히지 않았다면 간수와 그 가족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해서 그들의 삶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섭리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드라마틱한 과정을 통해서 믿음을 고백했을 수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잔잔하고 고요하게 믿음을 고백했을 수도 있습니다. 과정이 어떠했든지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고 주의 성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지금,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혹자는 하나님이 시작하셨든지 내가 시작했든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게 중요한 거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시작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단순히 과거에만 의미 있는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에 착한 일을 시작하시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시작하신 일을 지금도 여전히 은혜로 인도하시고 마지막까지 은혜 가운데 완성하실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확신합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우리에게도 이런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그분 손에 달려있음을 고백하며 온전히 나의 삶을 맡길 수 있습니다. 인생이 아무리 힘들어도 나에게는 염려할 필요도 없고 도망치고 포기할 권리도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 맡겨드릴 뿐입니다. 실제로 바울이 그랬습니다. 감옥 안에서 언제 처형당할지 모르는 암담한 그때, 바울은 하나님의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꿈을 꾸며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노예로 끌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 감옥에 갇혔지만, 그것은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는 과정이었습니다. 하나님께는 놀라운 꿈이 있으셨습니다. 모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애굽 왕궁에서 40년을 살다가 미디안 광야로 쫓겨났지만, 그의 삶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일부였습니다. 현실은 어렵고 힘이 듭니다, 그러나 시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힘든 오늘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현실은 후사를 이을 자녀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자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낳을 수 없는 암울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꿈이 있었습니다.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4-5)
신앙인의 삶은 현실에 매몰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현실을 뛰어넘는 삶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너무 어렵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이해가 안 될지라도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까지 우리를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삶의 여정이 다 끝나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께서 은혜로 붙으시고 인도해 주실 것을 믿으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확신 속에서 바울처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언제나 주어진 삶 속에서 입술로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영향력을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빌1:3-5)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아름답게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이 믿음과 확신 속에서 나의 삶을 온전히 맡기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착한 일, 복음의 일에 참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황덕영 목사
새중앙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