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신부 9명을 비롯해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된 병인박해가 시작된 게 1866년이었다. 박해는 1871년까지 이어졌다. 불과 14년 후인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조선에 도착했다. 선교사들이 이처럼 자유롭게 입국할 수 있었던 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때문이었다.
선교의 문이 열리자 수많은 선교사가 조선을 선교지로 택했다. 이들은 경쟁보다 연합에 방점을 찍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했던 각국 선교부는 오랜 협상 끝에 1909년 ‘선교지 분할 협정’에 공식 조인했다. 같은 지역에서 여러 선교부가 경쟁하지 말고 지역별로 선교지를 나눠 갈등을 피하자는 게 협정의 골자였다.
이 결과 미국북장로교는 서울과 평안남북도·황해도·경상북도를, 미국남장로교는 전라남북도 선교를 맡았다. 캐나다장로교는 함경남북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미국북감리교와 남감리교는 각각 서울과 경기·충청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일부, 서울과 개성·강원도·원산에 선교부를 설치했다.
이 협정으로 연합이 가능했다면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한국인의 빠른 자립을 도왔다. 초창기 선교사 대부분이 신학교를 갓 졸업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선교사끼리의 관계는 물론이고 한국인과의 관계에도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미국북장로교 선교부는 중국 체푸의 존 네비우스 선교사를 서울로 보냈다. 1855년부터 중국에서 사역하며 ‘선교방법론’이라는 제목의 논문도 발표했던 네비우스는 보름 가까이 서울에 체류하며 젊은 선교사들에게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교회를 형성하라”고 조언했다.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 정신을 골자로 하는 토착교회 육성을 주문한 것이었다. 네비우스 선교사는 장로교 소속이었지만 당시 국내에 있던 여러 교파 선교부는 그의 제안을 수용했다.
선교를 위한 두 개의 기둥이 세워지면서 사역은 빠르게 자리 잡았다. 선교사들은 전국 주요 도시에 교회와 병원, 학교를 세웠다. 이를 통해 목사와 의사, 교사 선교사를 통한 이른바 ‘삼사 선교’를 뿌리내렸다. 이들 시설이 모여 있는 곳을 ‘선교 스테이션’이라고 불렀다. 선교 거점인 셈이다. 거점을 중심으로 인근 도시로 사역을 확대했다.
선교사들이 세운 선교 스테이션이 여전히 전국 각지에 남아 있다. 전주·광주·대구 스테이션이 대표적이다. 긴 세월 역사가 이어지면서 이곳의 교회와 병원, 학교는 그 지역에서 필수시설로 성장했다. 시설뿐 아니라 이를 일군 선교사들의 가슴 찡한 헌신의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독일 중남부의 뷔르츠부르크에서 퓌센까지 이어지는 350㎞의 길은 ‘로맨틱 가도’로 불린다. 과거 로마가 닦은 길이라고 이렇게 불리지만 많은 이들이 남녀 간 사랑의 이야기를 머리에 먼저 떠올린다. 자칫 잊힐 수도 있었던 이 길이 이름을 찾은 건 불과 70여년 전 일이다. 독일 정부가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이 길 근처 도시를 관광지로 개발하며 생명을 불어넣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전국의 선교 스테이션을 잇는 ‘복음 가도(복음의 길)’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삼사 선교는 우리나라의 근대를 열고 왕정 국가였던 조선과 현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이를 알리고 후대에 계승하기 위해서는 로맨틱 가도를 만들었던 독일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복음의 길, 복음 가도를 꿈꿔 본다.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