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이사회는 신임 총장에 조너선 리 월턴 박사를 선임했다. 월턴 박사는 아프리카계(흑인)로 하버드대 교수와 교목, 웨이크포레스트대 신학부 학장을 역임했다. 내년 1월 1일부터 총장직을 수행한다. 월턴 박사는 기독교 사회윤리학자로 복음주의 기독교와 대중 매체, 정치 문화 등에 학문적 관심을 두고 있다. 프린스턴신학교는 미국장로교(PCUSA) 교단 신학교로 1812년 설립됐다.
앞서 지난달엔 대표적 초교파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신학교가 신임 총장에 데이비드 이매뉴얼 고틀리 박사를 임명했다. 고틀리 박사 역시 흑인이다. 듀크대 신학부 흑인교회 책임연구자를 역임했고, 25년간 롯케리침례회 외국인선교회 대표로 봉직하면서 기아 인종차별 불평등 학살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풀러신학교는 1947년 찰스 풀러와 해럴드 오켕가 등 이른바 신복음주의자를 중심으로 설립된 신학교다.
전통적으로 백인 중심의 미국 신학교에 흑인 총장들이 등장하고 있다. 신학적으로 비교적 자유로운 성향의 신학교뿐 아니라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학교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보수 성향의 신학교는 아직까지 백인 총장과 교수들이 우세하지만 학생 구성원에서는 아시아나 아프리카, 히스패닉계 등이 증가하고 있어 향후 미국 신학교 수장은 인종적으로 더 다양해질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백인 중심의 신학교가 쉽사리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글로벌 기독교 현실 반영
과거 미국 신학교는 백인 중심이었다. 총장과 교수진, 학생 모두 백인이 우세했다. 하지만 최근 10~20여년 사이 판도가 달라지고 있다. 그 배경엔 기독교의 주류가 서구에서 비서구로 이동했다는 현실이 있다. 미국교회의 쇠퇴로 백인 신학생은 줄고, 비서구권 출신 학생과 외국 유학생이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프린스턴신학교는 현재 학생 52%가 비서구권 출신이다. 이 학교 이사인 임성빈 전 장로회신학대 총장은 28일 “학생들의 인종 분포가 백인에서 다인종으로 변화하고 있다”며 “이러한 흐름이 흑인 총장을 탄생시킨 배경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는 “월턴 총장 내정자는 이미 학문적으로나 목회적으로 탁월함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버드대 교수 겸 교목 재직 당시 그의 설교를 들은 학생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다인종 출신의 총장이 미국 신학교에 포진하는 것은 리더십에 있어서 신학교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미국 신학교도 이제 이런 흐름을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프린스턴신학교 총장 선발 기준은 후보의 학문적 성과와 개혁신학 지향, 교회와의 소통 능력, 공적 영역에서의 기독교 변증과 소통 역량 등이었다. 70명의 후보 추천을 받았고 이후 30명으로 압축해 총장추천위원회(이사 대표, 교수 대표, 학생 대표)의 인터뷰를 거쳐 만장일치로 결정됐다.
현재 미국 신학교 총장 중 흑인이나 비서구권 출신은 의외로 많다. 우선 다음 달 12일(현지시간) 컬럼비아신학교 총장으로 취임하는 빅터 알로요 박사는 중남미 푸에르토리코 출신이다.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를, 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린스턴신학교 부학장을 역임했다.
아프리카계는 브래드 브랙슨(시카고신학교) 에릭 앤서니 조지프(멀트노마신학교) 알톤 폴라드 3세(루이빌장로교신학교) 마이카 맥크리어리(뉴브룬스윅신학교) 라키샤 월론드(뉴욕신학교) 킴벌리 존슨(이스턴대-팔머신학교) 아사 리(피츠버그신학교) 총장 등이 있다. 얼라이언스신학교는 인도계 신학자인 라잔 매튜 총장이, 클레어몬트신학대학원은 말레이시아계 카진 제프리 쿠안 총장이 포진하고 있다. 버클리연합신학대학원(GTU)은 한국계인 유라이아 킴 총장이 맡고 있다.
신학교 수장이 이처럼 다인종화 되는 현실은 학생 분포와도 무관하지 않다. 북미신학교협의회(ATS)가 작성한 연례 보고서(2021)에 따르면 신학생은 다인종 출신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아시아계의 경우 2017년 5647명에서 2018년 5559명, 2019년 5857명, 2020년 6371명, 2021년 6982명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흑인 학생도 2017년 8908명, 2018년 9565명, 2019년 9591명, 2020년 9478명, 2021년 9990명 등으로 증가세를 나타냈다. 히스패닉 학생의 경우는 2017년 5112명, 2018년 5248명, 2019년 5383명, 2020년 5687명, 2021년 5790명 등으로 증가했다.
반면 백인 학생 증가는 다소 둔화세를 보였다. 2017년 3만7504명에서 2018년엔 3만9621명으로 증가했으나 2019년 3만8581명, 2020년 3만8254명, 2021년 3만8151명으로 소폭 감소세를 보였다. 현재 ATS에 가입된 미국 및 캐나다 소재 신학교 및 신학대는 280곳에 이른다.
다인종 사회를 위한 포석
흑인 총장 선임에는 최근 미국 대학에서 불고 있는 ‘역사 바로잡기’ 흐름도 관련이 있다. 인종차별과 노예제도 운용 등을 반성하면서 이를 공개 사과하고 허물에 대해서는 바로잡는 조치를 하는 것이다. 바이든 행정부가 다인종 사회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대학과 신학교들도 보조를 맞추는 모양새다.
하버드대는 지난 4월 과거 노예제와 인종주의에 일조했던 캠퍼스의 역사를 규명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기금 1억달러를 조성하기로 했다. 당시 보도에서 로런스 배카우 하버드대 총장은 “노예제와 그 유산은 400년 넘게 미국인의 삶의 한 부분이었고, 하버드대는 매우 부도덕한 영속적 관행으로부터 일정 부분 혜택을 누렸다”면서 “계속되고 있는 그 영향을 추가로 바로잡는 작업을 위해 앞으로 몇 년간 지속적이고 야심 찬 노력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프린스턴신학교도 지난 2월 이 대학 두 번째 교수였던 새뮤얼 밀러를 기념해 만든 ‘밀러 채플’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하는 결정을 내렸다. 장로교 목사였던 밀러 교수가 일생 흑인 노예를 고용했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프린스턴신학교 이사회는 “밀러를 기념하며 세워진 예배당에서 그의 이름을 삭제한 건 대학 공동체가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새로운 미래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밝혔다. 학교는 이후 흑인 연구소를 비롯해 흑인 석좌교수를 모시기도 했으며 1학년 학생들을 위한 ‘라이프 투게더’라는 과목도 개설해 인종 감수성을 키우고 있다.
한편 다인종 출신의 학자를 총장으로 세워도 미국 신학교의 오래된 뿌리인 백인 중심의 신학은 변함이 없을 거라는 전망이 나온다. 정성욱 덴버신학교 교수는 “미국 신학교가 인종적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흑인 총장을 세우는 것은 매우 긍정적”이라면서도 “백인 중심의 문화는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진정한 다양성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말하는 하나됨을 추구하며 서로 복종하는 분위기가 돼야 할 것”이라고 했다.
세계적 기독교 통계학자인 고든콘웰신학교 토드 존슨 교수는 5년 전 방한했을 때 미국 기독교의 핵심을 ‘백인 남성 지배 신학(white male dominant theology)’으로 명명하고 이를 미국교회가 풀어야 할 숙제라고 밝힌 바 있다. 전병철 아신대 교수는 “다인종 출신 총장이 등장하는 것은 신학교의 리더십을 세계교회와 공유하겠다는 긍정적 신호로 볼 수 있다”며 “그러나 신학교의 주도권은 계속 백인들이 가져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