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원전 사업 수주를 놓고 한국과 경쟁 중인 미국 기업이 한국수력원자력과 한국전력을 대상으로 수출통제 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정부 허가 없이는 다른 나라에 원전 수출을 못 하게 하라는 요구다. 원전 수출을 미래 먹거리 중 하나로 꼽은 윤석열정부 구상에 막대한 차질이 우려된다.
블룸버그통신은 24일(현지시간) 미국 원전 기업 웨스팅하우스가 지난 21일 워싱턴DC 연방지방법원에 한수원과 한전을 상대로 지식재산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한수원의 APR1400 원전 기술이 미국 원자력에너지법상 무단 이전을 금지한 수출통제 대상이어서 미 정부와 웨스팅하우스의 승인·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웨스팅하우스는 2008년 ‘시스템 80’ 원전 기술을 보유한 미국 기업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을 인수했다. 한수원이 이 기술을 토대로 개발한 APR1400 기술을 들고 폴란드 원전 사업 수주에 뛰어들어 지재권을 침해했다는 주장이다. 웨스팅하우스는 사우디아라비아, 체코 등 다른 원전 사업 발주 국가도 언급하며 한국의 독자적 원전 수출을 막아 달라고 요청했다.
한수원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에 원전 4기를 수출할 당시 해당 기술을 사용했고 웨스팅하우스의 문제 제기로 기술 자문료 등을 지급한 뒤 사용허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신고리와 한울 원전 건설 과정에서 기술 국산화를 이뤄 한국형 원전 APR1400을 만들었다는 입장이다.
이번 소송은 폴란드 원전 수주를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글로벌 코모디티 인사이츠는 “웨스팅하우스가 폴란드 원전 거래와 관련해 한국 업체를 고소했다”며 “최근 폴란드 언론은 익명의 소식통을 인용해 ‘한수원 입찰 가격이 가장 낮았다’고 보도했다”고 설명했다. 한수원이 입찰에서 우세한 상황을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웨스팅하우스 측 소장에도 “한수원이 폴란드 정부와 APR1400 원자로를 공급하기로 하는 양해각서(MOU)에 서명할 예정임을 알게 됐다”는 표현이 담겼다.
미 에너지부는 웨스팅하우스, 벡텔과 함께 지난달 12일 미국 기술을 활용해 원전 6기를 건설하는 계획을 폴란드 기후환경부에 제출했다. 이후 원전 수출을 위해 정부 차원의 총력 지원에 나서고 있다. 제니퍼 그랜홈 미 에너지부 장관은 지난 23일 워싱턴DC에서 폴란드의 야체크 사신 부총리와 안나 모스크바 기후환경부 장관을 만나 미국의 원전 건설 제안 등을 논의했다.
사신 부총리는 이후 기자회견에서 “폴란드의 전체적인 안보 구조에 있어 미국이 전략적 파트너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며 “(사업자 선정에) 그런 요인을 고려할 수밖에 없고, 우리는 최종적으로 웨스팅하우스를 선정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블룸버그는 “폴란드 원전 건설에 웨스팅하우스 선정이 임박했다”고 보도했다.
원전 수출은 한국 정부가 중점적으로 추진해온 사업이자 한·미 간 협력을 약속한 분야다. 윤석열 대통령은 25일 시정연설에서 “원전 수출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윤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5월 정상회담에서 제3국 원전 시장 진출 등 원자력 협력 강화를 합의했다. 한수원이 폴란드 원전 수주에 실패하고 소송에서 진다면 이 문제가 한국산 전기차 차별 논란에 이은 또 다른 한·미 갈등 요인으로 부상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