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인 1882년 발생한 임오군란의 기폭제는 밀린 군인 월급 대신 지급된 쌀에 가득 섞인 모래였다. 미국 남북전쟁 때도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 북부군의 보급품인 로스팅 커피에 모래를 섞는 군납 비리가 터졌다. 군 당국은 할 수 없이 생커피콩을 보급했으나 전쟁통에 병사들은 커피를 직접 로스팅해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이후 커피와 연유를 섞어 졸인 제품이 개발돼 뜨거운 물만 부어 마시면 됐다. 커피믹스의 원조다. 그러나 맛이 별로 없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차 대전 당시 보급이 쉬운 분유가 탄생하면서 전쟁에 지친 미군을 위로하는 참호 속 기호식품으로 재탄생했다. 2차 대전 때는 동결건조 기술이 개발돼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났다.
커피믹스는 한국에서 전성기를 맞았다. 동서식품이 1976년 1인용 봉지 커피믹스를 세계 최초로 개발했는데 커피와 설탕, 크림의 절묘한 조합에 반한 외국 관광객들의 쇼핑 리스트 1위 상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요즘엔 당과 포화지방 기피 성향으로 아메리카노 등 원두커피에 밀리는 추세지만 여전히 어느 직장이든 탕비실 비치 필수품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 4일 밤 경북 봉화군 아연광산 갱도 붕괴로 190m 지하에 고립됐다 221시간 만에 생환한 광부 2명이 커피믹스 30봉지를 나눠 먹으며 버텨냈다고 한다. 생환자의 조카는 “커피믹스를 위에서 떨어지는 물에 타서 한 모금씩 서로 나눠 마시면서 버텼고 암벽에서 떨어지는 물을 식수로 썼다”고 전했다. 앞서 이날 새벽 “커피믹스 드시면서 나타나실 거예요”라는 한 누리꾼의 예언 댓글(?)까지 회자하면서 커피믹스의 위력이 새삼 주목받고 있다. 100g 무게 블랙커피 한 잔의 열량이 5~6㎉에 불과하지만 12g짜리 맥심 모카골드 한 봉지는 10배인 50㎉나 된다. 당과 카페인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광부들의 기운을 북돋아 생존에 도움을 줬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미군의 전쟁 식품으로 탄생한 커피믹스가 한국에선 생명을 살리는 비상식량이 되어준 셈이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