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COP27)가 협상 연장 끝에 기후 재앙을 겪는 개발도상국의 ‘손실과 피해’ 보상을 위한 기금 조성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오염물질을 더 많이 배출하는 선진국에 기후 위기의 책임을 물을 수 있게 돼 역사적 합의라는 평가가 나온다. 하지만 재원 마련 방안과 함께 기금 규모 및 운용 방안 등은 구체화되지 않아 향후 난관이 예상된다.
COP27 의장인 사메 수크리 이집트 외무장관은 20일(현지시간) 손실과 피해 보상을 위한 기금 조성 등을 담은 총회 결정문이 당사국 합의로 채택됐다고 밝혔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보도했다. 이집트 샤름 엘셰이크에서 지난 6일 개막한 올해 총회는 지난 18일 폐막 예정이었으나 주요 쟁점에 대한 당사국 간 견해차로 연장 협상에 돌입했고 결국 합의로 끝을 맺게 됐다.
셰리 레흐만 파키스탄 기후변화부 장관은 “이번 합의는 기후변화로 생사 갈림길에 선 전 세계 취약계층에게 희망을 줬다”고 말했고, 카리브해 섬나라 앤티가 바부다의 몰윈 조셉 환경장관은 “손실과 피해 보상금이 합의된 건 전 세계의 승리”라고 밝혔다. 앤티가 바부다는 기후변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으로 수몰 위기에 처한 대표적 섬나라다.
총회의 가장 뜨거운 감자는 올해 처음 정식 의제로 채택된 ‘손실과 피해’ 보상 문제였다. 극심한 기후변화로 고통받은 개발도상국은 탄소배출 등으로 기후변화 위기를 초래한 선진국이 손실과 피해를 당장 보상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국토의 3분의 1이 물에 잠기는 대홍수로 1700여명이 사망한 파키스탄, 해수면 상승으로 국토가 물에 잠기기 시작한 카리브해와 남태평양 등의 섬나라들이 피해 보상을 주도했다.
BBC는 “부유한 국가들은 이 논의를 30년 동안 회피해 왔다”며 “그러나 최근 파키스탄, 나이지리아, 기타 지역에서 큰 홍수가 발생하자 상황이 바뀌었고, 마침내 총회에서는 손실 및 피해 문제가 협상 의제로 채택됐다”고 설명했다.
협상 과정은 험난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선진국 입장에서는 보상에 합의할 경우 기존에 개도국에 지원했던 ‘기후금융’에 더해 새로운 지원을 해야 해 천문학적인 금액을 지급해야 한다. 2009년 선진국들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2020년까지 개도국에 매년 1000억 달러(약 134조원)의 지원을 하겠다고 뜻을 모았고 2019년 기준 796억 달러를 지원했다. 이런 이유로 EU는 자금 지원국을 확대해야 하며 중국 등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국가가 재원 마련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구 온도 상승 폭도 당사국 간 견해차가 컸다. 중국 브라질 등은 2도 목표 설정을 요구했지만 EU 협상대표단은 최종 문안에 1.5도가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EU는 협상이 진행되지 않자 보이콧 가능성을 거론하며 참여국을 압박했다. 결국 COP27 개최국인 이집트가 중재에 나섰고, 파키스탄이 EU를 설득하며 ‘지구 온도 상승 폭 1.5도 제한’과 손실과 피해 보상에 대한 최종합의를 도출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손실과 피해 보상을 위한 기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이번 합의문에는 재원 마련 방안과 피해에 대한 정의, 보상금 분담 방식 등은 담기지 않았다. 내년 11월 COP28에서 임시위원회가 어떤 국가가 기금 재원 마련에 참여할 것인지 권고토록 했지만 이 과정에서 당사국 간 격론이 오갈 가능성이 크다.
향후 미국과 중국이 손실과 피해 보상에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주목된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버니스리는 BBC에 “미국은 기후금융을 제공했지만 세계 최대 탄소배출국으로서 개도국 지원 책임을 다하는 데 실패했다”며 “중국과 미국이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면 나머지 국가에 완전히 새로운 해결책이 제공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미 극한으로 치달은 개도국의 피해를 보상하려면 이번 합의문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그린피스 독일지부의 마르틴 카이저는 “해당 합의는 거대하게 벌어진 상처 위에 붙인 조그마한 반창고와 같다”고 평가했다.
박재현 기자 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