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병사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패트리샤 리(47·사진) 변호사가 미국 네바다주 대법관이 됐다. 아시아계이자 흑인 여성이 네바다주 대법관이 된 건 처음이다.
스티브 시설랙 네바다 주지사는 21일(현지시간) “리 변호사를 주 대법관으로 임명해 자랑스럽고 영광스럽다”며 “능력의 폭과 깊이, 개인적이고 전문적인 경험이 주 최고 법원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리 대법관은 역경을 딛고 일어선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네바다주 법관인선위원회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자신을 “외국에서 태어나 집도 없이 가난하고, 학대받은 어린 시절을 보낸 혼혈 여성”이라고 소개했다.
리 대법관은 전북 전주에서 태어나 만 4세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반덴버그 공군기지 인근으로 이사했다. 그는 “아버지가 흑인이어서 나의 출생은 한국에서 못마땅한 일로 여겨졌고, 혼혈이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적었다.
미국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아버지는 헌신적이었지만 전역 후 군생활 때 받은 고통으로 알코올중독자가 됐다. 만 7세 때 부모가 이혼했고,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리 대법관은 이후 어머니와 두 남동생을 데리고 가장 노릇을 했다. 그는 어머니가 영어를 거의 못해 8살 때부터 기초생활수급 서류를 대신 작성했던 기억도 이야기했다. 당시를 푸드스탬프(빈곤층 식비지원제도)나 다른 정부 지원에 의존해 겨우 연명했던 시간으로 회고했다. 그는 “먹을 음식, 입을 옷, 잠잘 곳을 확인하는 게 매일의 임무였다”고 고백했다.
리 대법관 가족은 갖은 노력에도 살던 곳에서 자주 쫓겨났고, 한 해 2~3차례씩 거처를 옮겨야 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어느 순간에는 노숙 생활도 했다. 학대받은 여성을 위한 쉼터에서 얼마간 정착할 수 있을 정도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침대 밑을 기어 다니던 바퀴벌레와 잦은 퇴거 통지서’로 유년 시절을 묘사했다. 그러면서도 “암울한 상황이었지만 가족과 함께 잠잘 곳이 있음을 감사했다”고 언급했다.
어머니가 새로 사귄 남성으로부터 학대를 받았고, 이를 견디다 못해 15세 때 가출한 뒤 ‘카우치 서핑’(다른 사람 집의 남는 소파에서 잠자며 생활)을 하며 살았다. 하지만 고교 3학년 때 전교학생회장과 응원단장을 맡았고, 최상위권 성적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학업에 매진했다.
리 대법관은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어려움이 자신을 강하게 했고, 남은 생애 자신을 전진하게 하는 끈질긴 직업윤리를 만들었다고 고백했다. 가난에 시달리던 고난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동기를 부여했고, 다른 사람들을 돕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그는 서던캘리포니아대(USC)와 조지워싱턴대 법학전문대학원을 졸업하고 2002년부터 로펌 ‘허치슨 앤드 스테펀’에서 일했다. 소규모 사업을 하는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로펌 홈페이지에선 자신을 “하드코어 사커맘”(교육에 열성적인 엄마)으로 소개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