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수교 140주년을 맞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오는 13일까지 진행되는 특별전에서는 낯선 땅에서 조국의 자주외교를 위해 고군분투했던 외교관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여러 유물 중 한 곳에 시선이 갔다. 호러스 앨런 선교사가 주미조선공사관 공사로 활동할 때 사용한 명함이었다. 작은 명함의 상단에는 ‘대됴션국’과 ‘Legation of Korea(한국공사관)’이라고 쓰여 있고 아랫부분에 ‘닥터 앨런’이 영문 필기체로 기록돼 있는 소박한 명함이었다.
앨런은 1932년 사망했지만, 그의 명함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90년이 지나 박물관에 전시돼 후대와 마주했다. 그가 남긴 흔적과 조우한 이들은 명함을 통해 그의 삶을 기억해낸다.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왔다 자주외교를 꿈꾸는 고종에게 발탁돼 다시 자신의 모국으로 돌아갔던 한 사람의 삶의 조각들이 묻어 있는 듯했다.
인간이 지난 자리에는 모두 흔적이 남는다. 무덤은 또 어떤가.
2011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갔다 남쪽으로 200㎞ 떨어진 도시 툴라의 작은 마을 야스나야 폴랴나를 방문했다. ‘밝은 숲속의 초원’이라는 뜻을 지닌 이 마을은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살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 생가박물관으로 가는 길 초입에는 톨스토이가 사색을 즐겼다는 자작나무 숲길이 길게 이어져 있다. 집 주변에 사는 농부들을 데려다 글을 가르쳤다는 농민학교를 지나면 톨스토이가 48년을 살던 생가가 나온다. 거기에서 100m쯤 더 발길을 옮기면 잔디가 듬성듬성 덮여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흙더미를 볼 수 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초라한 무덤으로 그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 한 땅이 필요한가’에 담긴 교훈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다.
지난달 초 인천 강화군 길상면의 한 야산에 올랐다. 300m쯤 갔을까. 낙엽이 수북이 쌓인 산길 중턱에 오래전 만든 것으로 보이는 네 개의 무덤이 나타났다. 그중 산 정상에서 가까운 곳에 나란히 있는 무덤 앞에 빛바랜 비석이 있었다.
‘김해김공동수영구지묘(金海金公東秀永龜之墓)’라고 쓰여 있었고 아랫부분에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요한복음 12장 24~26절 말씀이 기록돼 있었다.
1907년 8월 21일 일제에 의해 목숨을 잃은 의병 김동수(1862~1907) 영구(1881~1907) 형제의 무덤이다. 묘는 이들이 세상을 떠난 직후 만들어졌지만, 묘비는 1970년대 초반 영구씨의 둘째 딸이 세웠다고 한다. 둘은 모두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교인으로 강화도에서 일제에 의해 처음으로 희생된 기독교인 의병이다.
이들의 무덤은 여전히 외진 야산 중턱에 있을 뿐이었다. 115년 전에도 일제의 눈을 피해 사람의 발길이 뜸한 산속을 택해 무덤을 썼을 터. 고목들 틈에 쓸쓸하게 있는 무덤은 일제에 항거하다 산화한 이들의 결기와 남은 가족들의 두려움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 수상이 1940년 히틀러에 의해 프랑스 덩케르크 해안에 고립된 영국군 30만명을 구출했던 일화를 그린 영화 ‘다키스트 아워’. 이 영화에는 “젊음이 떠난 자리에 부디 지혜가 남기를”이라는 처칠의 명언이 나온다.
인생에서 또 한 해를 더한 우리 삶이 남긴 흔적은 뭘까. 다시 연말이다.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