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기억으로 만나는 길



4월의 어느 날, 두 사람은 참담한 가슴을 부여잡고 터벅터벅 엠마오로 향하는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낯선 나그네에게 하소연에 가까운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예수라는 사람과 함께 지내며 꿈꾸던 새로운 세상과 그에 대한 희망,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맞은 그의 비극적인 최후, 사랑하는 선생님을 지키지 못하고 배신한 것에 대한 죄송함, 그 후 자기들에게 찾아온 절망과 어둠의 마음들은 뿌연 안개와 같은 짙은 회한으로 다가왔습니다. 나그네는 그들에게 메시아는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고, 그 고난을 겪은 후에야 하나님의 영광에 들게 되신다 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엠마오의 길에서 스승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을 겪은 후에야 하나님의 영광에 들게 되신다 하지 않았느냐”고, “그게 메시아의 운명이며 내가 평소에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느냐”면서 제자들의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기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의 의미를 떠올립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건 삶 자체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죠. 신앙생활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억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은 신앙생활의 시작과 끝입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부여잡고 울고 있을 때, 우리를 가만히 안아 주시고 일으켜 세워 주셨던 기억, 그 기억의 힘이 우리를 다시 나아가게 합니다.

두 제자는 엠마오 마을에 함께 도착한 나그네를 위해 정성껏 식탁을 차립니다. 나그네는 축사하고 감사기도를 올리고 나눠 주셨습니다. 그때 두 사람의 눈이 열렸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나눈 아주 작고 평범한 것을 통해 비로소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죠. 누구나 일상은 소중하면서도 뻔하고 지루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음식과 옷을 먹고 입으며,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특별한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서 특별한 기적을 체험하면 행복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남들은 멋지고 행복한 일상을 누리는 것처럼 보이고, 나는 권태롭고 비루한 일상을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신앙의 일상 속에서 조금씩 나도 모르게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특별함을 원하지만 지루하게 반복되는 신앙의 일상 속에서 믿음을 키우지 못한다면 결코 성장하지 못합니다. 오늘 두 제자는 반복되는 일상의 식탁에서, 작은 것에서 성심을 다하고 나그네를 섬겼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품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습니다.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제자들은 실패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그 길은 새로운 회복의 길로 바뀌어 가고 있었던 것이죠. 우리의 삶도 그럴 때가 많지 않습니까? 분명 나는 실패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돌이켜보니 오히려 회복과 영광의 길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경우 말입니다. 우리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하나는 실망과 낭패의 엠마오로 가는 길이고, 또 다른 길은 회복과 희망과 결단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 길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의 길입니다. 회색빛으로 가득한 불투명하고 모호하기만 한 우리의 삶처럼 때로는 두 길이 섞여 있을 때도 많지요. 성숙한 신앙의 길은 모호하고 불투명함을 견뎌 내는 일입니다. 하지만 두려워하거나 주저하지 맙시다. 언제나 주님이 함께하심을 우리는 이미 기억 속에서 순간순간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최병훈 동천안교회 목사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소속인 동천안교회는 천안시 동남구의 구성동에 작지만, 이 땅에 희망 없는 것들을 희망으로 만드는 데 힘을 다하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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