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이 즐비한 거리 인근의 부산 원룸촌. 이곳에 비좁은 월세방을 얻어 두 살배기 아기를 키우는 19세 미혼모가 산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 17살에 아빠 없는 아이를 낳았다. 그는 매일 밤이면 원룸 문을 잠근 뒤 술집으로 출근한다. 월세와 분윳값, 기저귓값으로 쓸 40만원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가출 청소년이라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치 않다. 그저 밤새 별일 없이 아기가 잠만 자주길 바랄 뿐이다.
14년 전 이효천(33) 한생명복지재단 대표가 처음 접한 청소년 미혼모의 현실이다. 당시 고신대 국제문화선교학과 새내기였던 이 대표는 목회자를 꿈꾸며 신학도가 된 스무 살 청년이었다. 그는 소년원 봉사활동 중 만난 소년원생이 ‘열심히 사는 친한 동생의 멘토가 돼 달라’며 부른 자리에서 위의 청소년 미혼모를 만났다. 그리고 이 한 번의 만남이 이 대표의 인생을 바꿨다. 지난 15일 경기도 안산 중앙역 번화가에 있는 한생명복지재단 본부에서 만난 그는 당시 일을 회상하다 잠시 감회에 젖었다.
“청소년 미혼모에서 이제는 어엿한 한부모 가정이 된 그 친구가 제게 해준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이 있지만, 제가 사는 세상에서 도움을 준 건 당신 한 명뿐이었다.’ 그 한 사람이 되고자 시작한 청소년 미혼모 사역이 벌써 10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한 생명, 한 영혼에 집중
안산 호산나교회 협력 선교사로 청소년 미혼모를 돕는 이 대표가 가장 먼저 세운 단체는 2008년 설립한 ‘바람선교회’다. 본격 활동에 나서자마자 예상보다 많은 청소년 미혼모에게 연락을 받았다. ‘미혼모를 돕는 친구 같은 오빠가 있다’는 이야기에 어린 엄마들이 미혼모 기관보다 선교회 문을 더 편하게 두드렸기 때문이다.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어린 엄마들이 늘면서 출산비 등으로 급전이 필요해지자 그는 막노동을 하면서 비용을 충당했다.
더 체계적인 지원을 위해 그는 2011년 비영리 법인 ‘위드맘 한부모가정지원센터’를 세웠다. 2017년엔 청소년 미혼모들이 캄보디아 등 해외 저개발국 빈민을 방문 및 후원하는 국제봉사단을 꾸리기도 했다. 학업을 못 마친 어린 엄마의 학력 취득과 자기 계발, 취업을 위해 2018년 ‘해아리대안학교’를 설립했지만, 현재는 코로나 사태로 문을 닫았다. 지난해부터는 ‘한생명복지재단’이란 이름으로 청소년 미혼모뿐 아니라 미혼 한부모 가정, 독거 어르신 가족 등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삶을 지지하는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한생명복지재단으로 단체명을 바꾼 건 미혼모의 출산과 양육, 물품 지원 및 경제·심리·사회적 자립을 돕는 게 재단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청소년 미혼모의 삶을 품어주는 ‘마지막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여러 미혼모를 만났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었던 건 미혼모의 한 생명, 한 영혼이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고요. 앞으로도 미혼모 가정의 생명, 이들의 영혼에 더 집중하자는 각오를 담아 재단 이름을 한생명복지재단으로 지었습니다.”
재단은 내년 12월을 목표로 ‘한지붕’이라 불리는 복합커뮤니티센터를 지어 미혼모 가정에 절실한 복지와 문화, 여가와 체육 및 교육 등의 서비스를 원스톱 지원한다. 안산 단원구 신길동에 세워질 복합커뮤니티센터엔 커뮤니티 시설과 상담실, 강의실과 헬스장 등 실내체육시설, 야간·긴급 어린이 돌봄 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청소년 미혼모 향한 편견 사라지길
이 대표가 청소년 미혼모를 지원하며 지금껏 꾸준히 들어온 질문은 ‘미혼모를 왜 돕는가’ ‘돕는다고 뭐가 달라지는가’였다. 학교와 가정에서 버림받은 이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는 특히 “또래처럼 청소년·청년 시절을 보낼 수 있도록 이들의 ‘또래 존엄성’을 찾아주자”며 미혼모 가족과 놀이동산, 여행 등을 다니자 ‘이것도 미혼모 지원이냐’는 질문도 받았다. 이에 대한 그의 답은 이렇다. “미혼모를 도우면 그 가정이 크게 바뀌고, 이들이 행복하면 가정도 행복해진다”고.
“오랜 기간 우리 목표는 미혼모의 자립이었습니다. 붕어빵 찍어내듯 검정고시 및 취업 지원을 해 자립시켰습니다. 나보다 돈을 더 잘 버는 이들도 꽤 나왔습니다. 그런데 한 엄마가 그러더군요. ‘돈 번다고 행복하냐’고요. 이때 ‘자립 때문에 이들의 존엄성을 놓쳐선 안 되겠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간 청소년 미혼모가 취업을 위해 받은 직업교육은 주로 헤어·메이크업 기술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배우고 싶은 건 따로 있었다. 도예, 인문학 공부, 폴댄스 등이 있었고, 이렇게 자신들이 배우고 싶은 교육과 기술을 터득한 미혼모는 현재 댄스스포츠 학원 등에 취업해 재단 살림에 보탬이 되고 있다.
이 대표의 바람은 청소년 미혼모를 향한 우리 사회의 시선이 좀 더 따뜻해지는 것이다. 그는 “아직도 미혼모는 윤리적 문제가 있고, 어린 나이에 책임질 수 없는 임신을 한 불쌍한 사람으로 보는 이들이 적잖다”며 “새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어린 엄마를 더 격려해주는 사회 분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안산=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