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취임 후 처음 멕시코 국경 도시인 텍사스주 엘패소를 방문했다. 불법이민자 수백~수천명이 매일 국경을 넘는 곳으로, 미국 이민 시스템의 붕괴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지역이다. 자신의 정치적 약점인 이민자 문제가 재선 도전을 위협하는 핵심 쟁점이 될 조짐을 보이자 이에 대응하기 위한 행보로 풀이된다.
AP통신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곳에서 4시간가량 머물며 마약·현금 등의 밀수를 탐지하는 차량 수색 과정을 지켜보고 국경을 가르는 철제 펜스를 따라 걸었다. 이민자 서비스센터도 방문했으나 이민자를 만나지는 못했고, 공개 발언도 하지 않았다.
현재 멕시코 국경을 통한 불법이민은 미국의 최대 정치·사회 이슈 중 하나다. 바이든 재임 2년간 해당 국경을 넘은 이민자가 급격히 증가해 2022 회계연도(지난해 9월 말 기준)에만 238만명을 기록했다. 멕시코 국경을 통한 불법이민자가 연 200만명을 넘은 것은 처음이다.
몰려드는 이민자를 수용해야 하는 텍사스·뉴멕시코 등은 바이든 정부에 대한 불만이 가득하다. 바이든 대통령을 마중 나온 그레그 애벗 텍사스 주지사는 편지 한 장을 전달했는데, ‘당신의 국경 방문은 200억 달러가 적고, 2년이나 늦었다’고 적혔다. 문제 해결 노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비판이다. 애벗 주지사는 “당신의 국경 개방 정책은 치명적인 펜타닐과 인신매매로 부자가 된 범죄 카르텔을 대담하게 만들고 있다”며 “텍사스 주민들은 당신의 실패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심각해지자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5일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 불법이민자를 즉각 추방하도록 허용한 ‘타이틀 42’ 조치를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기존의 멕시코 등에 더해 베네수엘라 니카라과 쿠바 아이티 4개 나라 국민의 육로 이민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다. 다만 4개국 국민의 항공편을 통한 합법적 이민은 매달 3만명까지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조치는 민주당 지지 세력과 공화당 양측에서 비난을 받고 있다. 진보 인권단체인 이민자정의센터는 “국경에서 더 많은 고통을 가할 것”이라며 “이 정책에 분노한다”고 지적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9~10일 멕시코시티에서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각각 양자 회담과 3국 정상회담을 한다. 이 자리에서도 이민자 문제가 주요 의제로 오를 전망이다. 멕시코는 육로 이민을 불허한다는 바이든 정부 구상에 대해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반발하는 상황이다.
로이터통신은 이날 방문에 대해 “이민자 문제를 심각하게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고 재선 도전을 위해 가장 정치적으로 부담되는 문제 중 하나를 다루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트럼프 대통령의 가혹한 이민 정책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리겠다고 약속했던 대통령에게는 힘이 빠지고 외로운 순간”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