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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기 伊 피렌체… 르네상스 뒤에 숨은 이야기들

'세계 서적상의 왕'으로 불린 15세기 피렌체의 서적상 베스파시아노 초상화. 베스파시아노의 흔적은 현재 피렌체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피렌체 지식계의 중심이었던 그의 서점은 피자 가게가 되었고, 그의 이름은 산타 크로체 성당의 작은 명판에 새겨져 있을 뿐이다. 책과함께 제공
 
피렌체 서점 이야기/로스 킹 지음, 최파일 옮김/책과함께, 640쪽, 3만5000원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하인후 옮김/무블, 780쪽, 4만4000원
 
이탈리아 중부의 아름다운 도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도시'로 유명하다. '천재들의 도시' '예술과 낭만의 도시'로 불리기도 한다. 15세기 피렌체로 데려가는 책 두 권이 출간됐다. 르네상스에 가려진 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렌체는 책의 도시였다. 정치의 도시이기도 했다.

‘피렌체 르네상스’라고 하면 아름다운 프레스코화, 대리석 조각상, 대성당의 돔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피렌체 르네상스는 회화와 조각, 건축에 그치지 않는다. 그 이면에 거대한 지식 혁명이 있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퀸틸리아누스, 루크레티우스 등 고대 작가들의 대대적인 복원이 있었고, 이것이 인문주의를 태동시킨 배경이 되었다.

고대의 위인들을 다시 불러낸 건 책이었다. 모든 책을 손으로 만들던 시대에 피렌체는 그 중심이었다. 먼지 쌓인 서가를 뒤지며 희귀 필사본을 찾는 책 사냥꾼들, 고대 그리스어를 라틴어로 옮긴 학자들, 보기좋은 서체로 책을 필사하는 필경사들, 지면의 빈 공간에 금박을 붙이고 장식 그림을 그리는 채식사들, 탐욕스럽게 책을 찾는 수집가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주선하고 감독한 서적상이 있었다.

영국의 중세 역사 저술가 로스 킹이 쓴 ‘피렌체 서점 이야기’는 15세기 피렌체의 책 이야기를 흥미롭게 펼쳐놓는다. 주인공은 서적상 베스파시아노. 그는 당시 가장 뛰어나고 영향력 있는 필사본 제작자로 ‘세계 서적상의 왕’ ‘15세기 피렌체 문화의 첫째가는 권위자’로 불렸다. 필사본의 황금기를 살면서 1000권이 넘는 책을 제작했으며, 생애 후반기에 필사에서 인쇄로의 전환을 지켜봤다.

이 책은 베스파시아노의 이야기를 통해 고대 저작들의 재발견이 방향 감각을 잃고 죽어가던 문명을 어떻게 소생시키고 재탄생시켰는지 알려준다. 또 중세에 책이 만들어지고 유통되는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베스파시아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모든 악은 무지에서 생겨난다. 하지만 작가들은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밝게 비춰왔다.”

15세기 피렌체를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죽기 1년 전 피렌체의 역사를 정리한 책을 완성했다. ‘군주론’ ‘로마사 논고’와 함께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피렌체사’가 그것이다. 이 책이 이번에 처음으로 완역돼 나왔다.

책은 13∼15세기 피렌체에서 벌어진 극심한 권력투쟁의 역사를 생생하게 전한다. 소설가 이문열의 추천사에 따르면 “역사 속 이탈리아, 피렌체는 그토록 인문적이고 문화적이면서도, 또 그토록 야만적이고 잔인했다.” 르네상스의 향기가 가득했던 피렌체는 피가 흘러넘치는 권력투쟁의 현장이기도 했다.

13세기에는 교황파와 황제파로 분열돼 있었고, 귀족 가문들은 서로 죽고 죽이다가 공멸했다. 권력은 평민에게 넘어갔다. ‘유력한 평민들’로 불린 직능조합 출신 평민들이 등장해 피렌체를 통치했다. 평민이 권력을 잡은 ‘공화정 시기’는 당시 다른 유럽 도시들과 구별되는 피렌체의 특별한 점이다.

하지만 권력을 잡은 평민들도 귀족들처럼 서로 패를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평민과 하층민 사이의 분열도 일어났다. 그러던 중에 메디치 가문이 부상하고 평민과 하층민의 지지를 받은 메디치가는 권력을 독점하다시피 한다.

마키아벨리는 서문에서 “공화국을 통치하는 이들에게 유익한 교훈은 도시(국가)의 불화와 분열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보여주는 것이며, 그렇게 지난 사례를 통해 현명해짐으로써 통치자는 도시의 통합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이다”라고 집필 방향을 밝혔다.

번역자 하인후는 “보통 마키아벨리 혹은 마키아벨리즘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비정한 냉혈한의 이미지일 것”이라며 그런 이미지는 ‘군주론’의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통합만이 외세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굳게 믿었기에, 마키아벨리는 항상 시민 정부의 열렬한 지지자였으며 언제나 뼛속 깊은 공화국의 주창자였다”고 평가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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