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 타락 이후 인간 본성엔 심각한 죄성 있어”

누구든지 아무 생각없이 불의한 법을 따라 행동한다면 홀로코스트를 설계한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처럼 끔찍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다. 사진은 1961년 예루살렘의 법정 피고석에 앉아있는 아이히만. 국민일보DB




A: 기독교변증학 수업 시간에 한 학생이 “교회에 가면 왜 사람을 죄인으로 취급하나요?”라고 물으면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는 자신을 그냥 죄인으로 취급하는 게 불쾌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몇 가지 관점에서 검토해보자.

첫째 계몽주의 철학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봤지만 지난 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발생한 잔혹한 전쟁범죄는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사악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와 세르비아 인종청소 같은 전쟁범죄는 인간이 얼마나 악할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둘째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주관성과 상대성을 강조하며 객관적인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을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성폭행 여성할례 여성전족 살인 등을 악행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해 의분을 느낀다면, 죄는 객관적인 것이다. 죄인에 대한 처벌도 당연할 것이다.

셋째 니체와 쇼펜하우어는 인간을 죄인으로 간주하는 기독교 교리가 사람들을 신의 노예로 만든다고 본다. 즉 기독교가 인간의 의식과 감정, 자유와 행동을 죄의 범주에 넣어 사람들을 죄책감을 가진 노예로 길들인다고 비판한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죄를 허상으로 보거나 죄책감을 근거없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오히려 죄의 실제성과 심각성에 주목한다. 죄는 독사의 독처럼 다른 사람의 생명과 공동체를 파괴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수반하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실정법을 잘 준수하는 시민들은 모두 선한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을까. 홀로코스트를 설계한 전범자 아이히만은 전범재판소에서 자신은 “법을 준수하고 총통의 지시를 수행했다”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했다.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재판을 참관한 후 집필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무사유(Thoughtlessness)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했다. 누구든지 아무 생각없이 불의한 법을 따라 행동한다면 아이히만처럼 끔찍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미국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는 당시 ‘인종분리법’에 맞서 시민불복종 운동을 전개하다가 수감되기도 했다. 비록 그가 흑인과 백인을 차별하는 실정법을 어겼을지라도 우리는 루터 킹 목사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인권 보호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아이히만과 루터 킹 목사를 비교하면 우리는 실정법 자체를 판단하는 더 높은 수준의 선의 기준, 모든 문화와 국가정책을 판단하는 보편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따라서 객관적인 죄를 부정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이나, 선악을 주관적인 깨달음의 영역으로 변질시키는 뉴에이지 관점보다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인간의 본성과 문화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악함이 있다는 기독교의 관점이 더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교회에서 듣게 되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말은 성경의 창조론과 인간론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 모든 사람은 부패함을 가진 채로 태어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비방 같은 것이 나온다고 말씀하셨다(마15:18).

성경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담의 타락 이후에 인간의 본성에 치명적이고 심각한 죄성이 있기 때문이다. 불치병자는 치료약 개발이 희소식이 되듯이 자신의 뿌리 깊은 죄성의 존재를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예수님의 십자가가 죄에 대한 유일한 치료제임을 깨닫고 믿어야 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이다.

김기호 한동대 교수
약력=서울신대 신학과, 연세대 철학과, 미국 바이올라대학교대학원(기독교변증학과), 미국 베일러대학교 철학박사, 한동대 신앙교육원장, 기독교변증사역연구소장
 
믿음을 키우는 팁
죄와벌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인 알료나와 그녀의 여동생 리자베타를 도끼로 살해한 뒤 자신의 범죄에 대한 자기 정당화를 시도하는 형사 소설이자 심리소설의 특성을 갖는다. 주인공은 처음엔 노파를 살해한 것에 대해 어떤 죄책감도 갖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비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마음 아파했을 뿐이다. 소냐가 건넨 성경을 읽으며 그는 조금씩 자신의 죄를 깨닫는다. 주인공은 나중에 자수를 하고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는다.

죄의식을 탐구하는 이 소설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이 없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인간의 내면과 죄의 심각성을 돌아보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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