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나름 상류층에 속했던 자로 당시로는 기득권의 표본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 3:5~6) 할례를 비롯해 바울은 육체에 속한 자들의 기준으로 보면 내세울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런 그가 지금 복음 때문에 로마 감옥에 갇혀서 이 서신을 빌립보의 교인들에게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라고 권면합니다. 구원받은 자로서 영의 눈으로 보니 자신이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며 영생이 허락된 존재가 된 것입니다. 바울 자신은 그러한 영의 사람인 자신을 ‘본받으라’(17절)고 했던 것입니다.
기준의 차이가 시선의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고 나니 세상에서 목메고 있던 것들이 그리 중하지 않음을 알게 됐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체험이 생전 경험한 적 없던 고난마저 능히 감당하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왜 예배합니까. 예수님이 진짜 내 삶의 주인이신가를 확인하며 결단하는 자리가 바로 예배의 자리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문제의 현장이 하나님 역사의 현장이 되는 것은 문제가 기도 제목으로 바뀔 때입니다.
여전히 우리는 코로나19 여파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정치, 외교적 환경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기도하는 건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가는 유일한 해법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렘 29:11)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과 소망을 주길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주님이 이 시대에 던지시는 메시지에 여전히 둔감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주님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넘치는 소망이 우리를 통해 나누어지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령한 복을 누리길 원하십니다.(엡 1:3)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셔서 기꺼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감당케 하셨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아끼지 않으십니다.
성도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심을 확신해야 영적 전쟁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주님과의 영적 소통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주님과의 불통을 안타까워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때론 막혀 있는지조차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로 돌이켜야 합니다.
사실 다윗의 죄는 사울보다 그 죄질이 더 나빴지만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진정한 회개를 통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전쟁에 임하면서 하나님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합니다.(대하 20:3) ‘낯을 향하여’란 말은 간절히 하나님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전쟁이 자신에게 속한 것임을 선포하시며 찬송하는 이들로 적군을 물리치게 하십니다. 우리가 주 안에 있으면 세상 가운데 이미 주님이 이겨 놓으신 싸움을 싸우는 주인공이 됩니다. 할렐루야!
최재복 부천 길교회 목사
◇길교회는 1983년에 개척돼 오직 길과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땅끝까지 전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지키고자 노력하는 교회입니다. 현재 필리핀 중국 영국에서 열정적으로 선교사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부천을 중심으로 생명의 방주 역할도 충실히 감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