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목회하면서 군선교 사역을 하는 A 목사님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을 받았다. “보험설계사로 일하는 집사님이 남편의 군 전역에 감사하다며 당황스러운 액수의 헌금을 보내왔다”는 내용이었다. A 목사는 “집사님은 그동안 남편 월급의 십일조는 출석하는 국군중앙교회에 헌금하고, 본인 수입의 십일조는 파주 지역 어려운 군 교회를 도왔다. 딸이 받은 장학금에서도 십일조를 헌금하곤 했다”면서 “주머니 속 송곳(囊中之錐·낭중지추)처럼 말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신앙을 가진 성도”라고 소개했다.
최근 만난 메일 속 주인공 문미라(54) 집사는 “큰 달란트를 받아서 거창한 주의 사역에 참여하지도 않는 평범한 집사인 제가 인터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 거절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저처럼 연약하고 부족한 작은 그릇 같은 사람을 그 크기대로 사용하시며 귀하다 여기시고 섬세하고 조용히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마음을 바꿨다”고 했다.
믿음의 어머니와 불신자 아버지
문 집사의 신앙은 외가 쪽에서 물려받았다. 가장 먼저 회심한 문 집사의 둘째 이모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전도하면서 외가는 신앙의 집안이 됐다. 둘째 이모 이영자 전도사는 24세부터 40여년간 전도사로 사역하다 은퇴한 뒤 2005년 별세했다. 아버지는 50대 후반부터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문 집사가 어려서는 신앙 문제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찰이 심해 집안은 평안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문 집사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고향 충남 보령의 의평교회를 다녔다. 모태신앙이다 보니 교회에 가고 성경 읽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하지만 중학교 때 과학 과목을 배우면서 성경 말씀에 회의가 들었다. 문 집사는 “다행히 그때 정말 성경공부를 강조하신 젊은 목사님이 부임하셔서 말씀을 배우다 보니 어느 순간 과학이라는 것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하나님이 계심을 믿게 됐다”고 말했다.
문 집사는 1988년 대학에 입학하면서 처음 고향을 떠나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서울 광천교회 담임이던 막내 이모부 장정일 목사와 횃불교회에서 시무하던 둘째 이모 이 전도사 집에서 번갈아 지냈다. 경건한 삶의 모습을 강조한 보수적인 고향 교회와 달리 비교적 자유로운 서울 교회 분위기를 보면서 혼란을 겪기도 했다. 문 집사는 “고향에서는 주일에는 1원 한 푼도 쓰지 못하는 분위기였지만 서울에서는 주일에 점심을 사 먹고 나들이도 가는 모습을 보며 의아했다”고 말했다. 그는 “말씀대로 사시는 두 이모 집에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율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고, 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불신자 남편과의 결혼
신앙과 삶의 태도 때문에 늘 갈등을 겪었던 부모님을 보면서 문 집사는 배우자를 위해 기도했고 당연히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직업군인이던 남편은 신앙이 없었다. 처음 결혼 얘기가 나왔을 때 스스로 갈등이 많았다. 결혼 전 외국계 회사에 다니던 문 집사는 한 달 동안 퇴근하면 회사 근처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로 답을 구했다. 그리고 둘째 이모가 남편을 만나 세례를 받고 나서 결혼하면 좋겠다는 말에 남편이 순종하면서 결혼을 결심했다.
남편은 교회 다니기로 한 약속은 철석같이 지켰다. 하지만 직업상 이동이 잦아 교회를 자주 옮겨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신앙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또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크리스천을 접하면서 생긴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쉽게 떨쳐내지 못했다. 문 집사는 “남편은 시간은 걸렸지만 가랑비에 옷 젖듯이 계속 말씀을 들으면서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면서 “지금은 주변 사람한테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고 다닌다”고 전했다.
신앙의 위기 속에 들려 온 ‘감사하라’
문 집사는 자신의 신앙을 계단으로 비유했다. 그는 “하나님은 놀라운 체험이나 엄청난 일들을 겪게 하시기보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게 하셨다”고 말했다.
문 집사에게도 신앙의 위기가 있었다. 치매를 앓던 시어머니와 6년이란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가족 모두 점점 지쳐가며 서로를 보고 웃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됐다. 교회를 가도 기쁨이 없고 말씀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이 2년 이상 지속됐다. 그래도 교회 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의지할 것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것만은 기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음속 어디선가 ‘감사하라’는 음성이 들렸다. 처음에는 그 말씀을 무시하고 ‘제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감사할 수 있느냐’고 따지며 버텼다. 하지만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결국 문 집사는 ‘별로 감사할 것은 없지만 하라고 하시니 감사할게요’라고 순종했다.
“시어머니 치매는 더 심해지고 남편은 진급도 안 되고 기쁠 일이 없는데도 계속 감사, 감사하니 정말 감사할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모든 것을 내려놓고 ‘지금까지 저를 인도하신 하나님이 앞으로도 그렇게 인도하실 텐데 내가 걱정할 게 뭐가 있나’라는 믿음이 생기기 시작하니까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고 여유가 생겼어요.”
문 집사는 “순종하니까 하나님의 방법으로 내 어려움을 순식간에 바꾸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내 생각만큼 하나님을 보려고 한 내가 얼마나 무지한지 깨달았다”면서 “아무리 어려워도 하나님 옆에만 붙어있으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그렇게 애쓰는 모습을 하나님이 어여쁘게 봐 주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축복의 십일조
어려서부터 어머니는 십일조의 본을 보여주셨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어머니가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철저하게 십일조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십일조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결혼 전 직장을 다닐 때와 달리 결혼하고 나서는 십일조가 쉽지는 않았다. 결혼 조건으로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남편은 빠듯한 형편에 부모님 용돈도 못 드리는데 십일조 헌금을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감을 나타내곤 했다. 하지만 고맙게도 남편은 기쁜 마음은 아니지만 문 집사의 생각을 따라줬다.
그런데 정작 십일조를 당연하게 여기던 문 집사도 적은 남편의 월급에서 십일조를 떼고 나면 생활비가 부족한 상황이 되자 마음에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지 말라’(말 3:8)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을 때 복을 쌓을 곳이 없이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는 말씀을 붙들고 힘들지만 계속 십일조 생활을 했다.
“어떤 때는 의무감으로 억지로 할 때도 있었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어요. 마음이 간사해서 ‘한 번쯤은 안 해도 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서 우선 월급이 들어오면 헌금부터 먼저 했어요. 그렇게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니 십일조를 감사함으로 드릴 수 있게 됐고, 감사함으로 드리니 정말 제가 한 것보다 넘치게 주시고 더 많이 주님의 일에 사용하도록 해 주셨어요.”
문 집사는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2018년부터 보험설계사 일을 시작했다. 문 집사는 “계약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으면 갑자기 예전에 권할 때는 거절했던 분한테 전화가 오는 등 하나님은 늘 제 걱정을 감사로 바꿔주셨다”고 고백했다. 문 집사는 본인 수입의 십일조를 재정적으로 어려운 군 교회에 보내고 있다. 처음에는 한 곳이었지만 지금은 네 곳에 보낼 수 있게 됐다.
작고 깨지기 쉬운 그릇도 애지중지하시는 하나님
문 집사는 간증 집회에 갈 때마다 ‘나도 저렇게 간증할 게 있었으면…. 저런 대단한 일을 난 왜 못할까’라고 생각하며 부러워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어느 날 문 집사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다. “토기장이가 빚은 여러 종류의 그릇 중 아주 작고 깨지기 쉬운 유리그릇 같은 나를 하나님이 돌봐주셔서 지금의 내가 있다”고.
“저도 부모로서 아이들을 키우지만 더 약한 아이에게 마음을 더 쓰는 것처럼 하나님도 너무나 연약한 성품의 제가 다칠까 봐 사면에 보호막을 세우시고 애지중지하셨다는 생각이 들자 너무 감사해서 눈물이 났어요.”
문 집사는 “상처받기 두려워 성도 간의 교제도 조심스럽고 봉사도 잘 못 하고, 하는 일도 한 가지 이상이면 버거워서 끙끙대는 볼품없는 저를 사랑하시고, 그런 저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저처럼 약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분도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