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미국과의 핵군축 조약 신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하면서 ‘핵 감축 시대’가 종언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미·러 간 극한 대결이 강대국의 핵군비 경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뉴욕타임스(NYT)는 21일(현지시간) “핵군축 조약에 대한 푸틴의 움직임은 공식적인 군비 통제의 종식 신호일 수 있다”며 “미국과 러시아의 마지막 핵 협정이 끝나가고 있고, 군비 통제가 소멸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뉴스타트는 2026년 2월까지만 유효한 상태다. 미·러 양측은 연장 협상을 벌여왔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시작 이후 대화는 사실상 끊겼다.
러시아 외무부는 푸틴 대통령이 뉴스타트 참여 중단을 선언한 국정연설 직후 “이 결정은 뒤집힐 수 있다”며 최종 결정이 아니라는 뜻을 밝혔다. 미국이 정치적 의지와 긴장 완화를 위한 선의를 보이면 결정을 번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도 조약 탈퇴가 아니라고 언급, 러시아는 당분간 핵탄두 수 제한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 계획 통보 등 의무를 준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전쟁이 1년 가까이 진행되는 동안 양국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어서 대체 협상을 모색하기가 불가능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폴란드 왕궁 정원의 쿠비키 아케이드 연설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의 승리가 되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라며 전의를 다졌다.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를 전장에서 패배시키는 건 불가능하다”는 국정연설 발언을 겨냥한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중단하면 전쟁이 끝나지만, 우크라이나가 방어를 중단하면 우크라이나의 종말이 된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우리 지원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있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바이든과 푸틴은 서로 상대가 질 수밖에 없다며 전쟁의 결과를 자신의 미래와 연결했다”며 “서방과 러시아 간의 생존 전쟁으로 격상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중국과 이란 북한이 핵전력 강화에 나서고 있어 이미 군비 경쟁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비핵화 단체인 글로벌 제로 존 볼프스탈 수석 고문은 “러시아가 조약을 깨고, 중국이 무기를 확장하고, 북한이 미사일 시험을 하는 상황”이라며 “푸틴의 발언은 정치적 선언에 가깝지만, 미국이 러시아와 경쟁하고 중국이 러시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핵무기를 확장해야 한다는 요구를 부추길 것 같다”고 우려했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제임스 액턴은 “뉴스타트가 종말을 맞기 전에도 중국과 러시아, 미국은 군비경쟁을 벌이고 있었다”며 “러시아의 뉴스타트 중단 결정이 이를 가속할 수 있다”고 말했다. NYT도 “핵군축 협상이 어려워지고 있다”며 “미·러 간에는 소통이 없고,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 뉴스타트는 전술 핵무기를 다루지 않고 있고, 중국은 군축 협상에 관심을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
노르웨이 오슬로 핵 프로젝트 소속 제임스 캐머런 연구원은 “상대의 전력을 어림짐작으로밖에 알 수 없는 탓에 양측 모두 최악의 시나리오를 바탕에 두고 더욱 정교한 (핵무기) 체계와 계획을 도입하면서 큰 불안정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