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 목사 “내 수화 보고 ‘농아’냐고 질문, 내 평생 들은 가장 큰 칭찬”

미주국민일보-국민문화재단 공동기획

목회자 탐방<3> 뉴욕 농아인 사역 10년, 뉴욕농아인교회 이철희 목사



수화를 접하고 소리 없는 대화에 큰 울림으로 지켜온 33년.

올해 설립 10년이 된 뉴욕농아인교회를 뉴욕지역 농아인들의 구심점으로 만들기 위해 일일찻집을 열고 농아인교회의 존재와 지역사회에 장애인 복지기관으로서의 인식을 홍보하는데 뛰는 이철희 목사.

‘아는 사람만 아는’ 뉴욕농아인교회에서 한국•미국•중국 수화로 다민족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는 이 목사는 손으로 전하는 복음의 중요성과 농아인들의 모국어인 수화, 다른 장애인과 다른 특수성, 농아인에 대한 관심을 위해 입과 손이 닮도록 정성을 쏟고 있었다. 


한국•중국•미국 수화 사용해
다민족 교인에 설교 이해 높여 


-뉴욕농아인교회 현황은.
“10년 전 뉴욕•뉴저지 지역에 있는 약 15명의 한인 농아인들을 위해 개척을 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사이 여러 명이 한국으로 영구 귀국했다. 

지금은 한인이 줄고 자연스럽게 외국인 숫자가 늘어났다. 그중 70% 정도가 홍콩•중국•대만 등 중국 계열이고 나머지가 한인, 남미, 러시아 등 다민족으로 구성됐다.”

-어느나라 수화로 예배를 드리나. 
“나라별로 수화가 다 다르다. 그래서 미국수화로 통일 시켰다. 안타까운건 제가 미국수화를 완벽하게 구사하지 못한다, 교인들도90%가 이민자다. 

교인들에게 예배, 특히 설교를 이해시키고 은혜를 끼치기 위해 그분들의 언어 방식을 최대한 따라서 한다. 그래서 교인들은 우리 목사가 설교를 이해시키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고 봐주신다. 실제로 많은 교인들이 설교를 이해를 하고 있다.”

-각 나라의 수화도 사용하나.
“참고 삼아 가끔씩 한다. 다행히 한국은 물론 중국수화도 한다, 수화를 할 때 나라•언어별로 특색이 있다. 
예를 들어 영어 ‘서비스(Service)’라는 단어가 한국어로 번역하기 애매하다. 

한국의 식당에서 ‘서비스 좀 주세요’는 무료로 뭔가를 달라는 뜻인데 예배는 영어로 ‘워십 서비스(Worship Service)’다. 여기서 서비스와 서비스업종에서의 서비스 등 각각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모두 한글화 시키는 건 어렵다.

이런 특색있는 단어들은 한국수화 또는 미국수화를 할용해 적절히 바꿔 전달을 하면 농아인들의 이해도는 굉장히 넓어지고 언어 선택의 폭도 넓어진다.”

-뉴욕의 농아인교회 숫자는.
“우리 교회는 처음부터 한인 농아인교회라고 붙이지 않았다. 뉴욕에도 여러 농아인교회가 있는데 자마이카•잭슨하이츠•브루클린•롱아일랜드•뉴저지에 하나 정도씩 있다. 그나마 교인들 숫자를 셀 만한 곳이 적다. 교인 숫자가 극히 적다.” 


수화 통역으로 농아인 사역 시작
농아인의 삶과 아픔 버릴 수 없어


-현재 교회는 렌트 중이라는데.
“현재 20명 정도 교회에 나온다. 주 평균 500달러가 헌금으로 들어온다. 한달이면 2000달러인데 뉴욕•뉴저지 농아인교회 중 가장 재정이 좋다. 렌트 1200달러 내고 70~80달러 유틸리티 내고 나머지 700여 달러로 개스 넣고 교제할 때 먹는 점심이 끝이다. 음식의 질도 걱정이다.” 

-그럼 어떻게 생활하나.
“자비량이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한국에서 1997년 IMF의 구제금융을 받기 전부터 IMF 같은 생활을 해왔다. 똑같이 힘들게 살아왔다. 미국에 와서 아무리 힘들어도 한국이나 여기나 같다. 원래부터 없었다. 와이프가 네일샵에서 일하며 생활하고 있다.” 

-어떻게 수화를 하게 됐고 얼마나 했나.
“15살때부터 시작해 33년 됐다. 제 삶의3분의 2를 수화를 했다. 농아인 목회도 30년 가까이 했고, 전도사 생활을 1995년 부터 했다.” 

-농아인 사역을 하게 된 계기는.
“10대 시절 어느 농아 아주머니와 병원에 수화통역을 위해 갔다. 의사는 이정도 병이면 고통도 컸을텐데 왜 이제 왔냐고 주의를 주듯 말했고 저는 아주머니에게 의사처럼 빙의되어 야단치듯 수화로 말했다. 아주머니는 ‘수화통역인이 없어서...’라고 말했다. 이 말에 충격을 받아 농아인의 삶과 아픔을 버릴 수 없었고 그렇게 오늘까지 30년을 넘겼다.

어느순간 돌아보니 너무 깊이 빠져 있었다. 이 손으로 안 고친 병이 없듯이. 농아인과 같은 수준의 고급 수화를 사용하고 있어 통역을 많이 하게 됐다. 그 후 도망갈 수 없었다. 제가 손을 놔버리면 그분들의 삶이 어려워진다.” 

-글자로 써서 전달할 수 있지 않나.
“아니다. 예를 들어 한국 농아인에게는 모국어가 한국 수화다. 한글은 제2외국어다. 두 개의 모국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국어는 수화이고 한글이 제2외국어다. 학창시절 제2외국어로 1~2년 일본어 배웠다고 쉽게 대화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하다. 차원이 다른 문제다. 

한글에 약한 것은 못 배워서가 아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어는 잘 하지만 외국어에 서툰 것과 비슷하다. 한국인이 미국 병원에서 아픈 증상을 설명하기 힘든 것처럼."

-후천적 농아인은 표현이 더 쉽지 않을까.
“농아인에게 언제부터 안 들렸냐고 물으면 80% 정도는 3~5살 때부터라고 한다. 보통 어렸을 때 홍역이나 장티푸스를 앓아 청력에 이상이 온다. 

장티푸스는 옛말로 염병이라고 했는데, 열병이라고도 한다. 이 열병이 올라오면 온몸의 열이 땀 등으로 배출되는데 고막도 열기 배출로 파열된다. 열병을 앓고 나서 병원에 가면 이미 고막이 터진 상태여서 치료시기를 놓쳐 청력을 잃게 된다. 그때가 보통 3-5살 사이라고 대답하는 농아인이 아주 많다.

경험상 15세 전후 기준으로 봤을 때 15세 이전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 습득이 잘 되듯이 중도장애가 15세 이후에 와서 수화를 배운다는 것은 7~8세 때 배우는 것을 이때 배우는 것이다.  

그러면 수화가 부족해 농아인들과도 능숙하게 교제를 못 한다. 결국 사이가 벌어지고 일반 사람과도 소통이 잘 안돼 어울리지 못하고 단절된다. 그래서 중도장애는 더 어렵다.

20세 이후에 농아가 되신 분들은 수화도 못해, 듣지도 못해, 농아인쪽으로 가지도 못 하고 이 사회에 포함되지도 못한다. 평생을 애매하게 살아간다.

이런분들은 교회에 오셔야 동화가 되고 이쪽 언어를 배워야 한다. 본인이 장애를 인정하고 수용해야 한다. 거부하면 갈 수 있는 길이 없다.”



오는 10월 설립 10주년 기념식 
농아인 안수집사 세울 예정 


-농아인의 삶의 형편은 어떠한가?
“농아인들은 일반 장애인들과 다르다. 똑같은 장애인이 아니다. 중간에 ‘통역’하는 사람이 있지 않으면 의사소통이 거의 안된다. 의사소통이 되는 장애인, 지적장애인, 농아인 이렇게 세 부류로 나눈다. 이 세 부류는 각각의 모임이 있어야 하는 게 맞다. 농아인의 문화와 언어가 따로 있다.

좋은 설교를 감정이입까지 해서 아무리 잘 전달해도 수화는 농아인의 언어이고 문화다. 우리의 언어•문화가 따로 있고 미국에 온 우리가 한인교회에 가듯이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농아인교회가 별도로 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분들은 ‘의사소통 장애’가 있는 것이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면 사회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 취업•학업에 따르는 제약은 다른 장애인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래서 이들의 생활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게 보통이다.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농아인들은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교인들은 적극적인가. 
“다양한 민족들에게 다양한 방식의 이해를 돕기 위한 노력을 하다보니 교인들도 적극적으로 봉사 한다. 봉사를 열심히 하신 분 중 두 분을 안수집사로 선정해 10주년 예배 때 세울 예정이다. 뉴욕의 농아인교회에서 우리 교회가 최초로 농아인 안수집사가 나오는 케이스다. 정말 훌륭한 분이다.

농아인교회 안에서 직분을 갖게 됨으로써 훨씬 봉사를 많이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교회와 목사가 가지고 있는 목회적 마인드가 잘 맞아 떨어지는 경우다.”

-수화로 교감이 잘 되나.
“농아인이 아닌 사람을 ‘청인(들리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나 저는 수화를 완벽하게 농아인 방식으로 한다. 한글화된 방식의 수화가 아닌 모국어화 된 농아인 방식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농아인들이 저에게 농아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내 평생 가장 큰 칭찬이었다.”

-농아인 사역자는 많은가.
“거의 없다. 한국인이 미국에서 하는 농아인 목회 규모는 LA가 제일 크고 교인 20명 정도인 뉴욕이 두 번째 규모다. 목회자는 다 합쳐봐야 10명도 안 된다.” 


뉴욕에서 가장 가까운 선교지는 
뉴욕농아인교회라고 기억해 주길


-수화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나.
“내용 준비는 한국어로 시작해 머리 속에서는 한국수화가 동시에 이루어진다. 설교 준비가 끝나면 미국수화로 번역을 한다. 세 가지 언어로 준비한다. 

설교 직후엔 수화로 전달된 내용을 보강하거나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파워포인트로 20~40페이지를 만들어 보여준다. 

설교 준비가 끝나면 연습도 해야한다. 또 주보도 만들어야 한다. 혼자 다 한다. 

때마침 7월에 농아인 부부인 부교역자가 온다. 같이 사역할 예정이다. 본인이 농아이기 때문에 농아인의 이해도가 높다. 나와 다르다.” 

-뉴욕 교계는 농아인교회를 잘 알고 있나.
“뉴욕농아인교회를 잘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런 교회가 있냐고 반문하기도 한다. 알려야 할 사명이 크다. 부목사도 오니 사역을 더 열심히 할 예정이다. 목회자가 없는 농아인교회도 방문하고 선교도 더 힘쓸 것이다.”

-농아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단기적으로 보면 뉴욕지역 농아인들의 구심점을 공고히 해주기 위해 작은 행사•이벤트에 소요되는 비용들이 충당되면 좋겠다. 예를 들어, 야외예배에 나가면 참석하는 농아인이 약 60명 인데 이들과 함께 나눌 음식 구입 비용이나, 아시안농아인협회의 행사가 잘 진행되기 위해 기념품, 식사 등을 지원할만한 재정이면 족하다.”

-뉴욕농아인교회의 사역의 중심과 계획은.
“더 많은 농아인들이 우리 교회를 찾도록 만드는 게 목표고 우리 교회가 민족을 떠나 구심점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두 번째다. 

장기적인 소망으로는, 이들의 사회 참여가 원활해지도록 지원하는 수화통역센터를 설립하고 싶다. 상시 운영으로 의사소통 문제로 일반 시설에서 잘 받아주지 않는 고령 농아인을 위한 주거 제공, 기술이 없는 농아인들에게도 직장을 다닐 수 있도록 작은 농아인 사업체를 운영한다든지 하는 소망들이 몇 가지 있다.”

-농아인 사역과 관련 뉴욕 한인에 전하고 싶은 것은.
“기독교인이라면 ‘뉴욕에서 가장 가까운 선교지는 뉴욕농아인교회’를 기억해 주시면 좋겠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뉴욕에는 농아인의 복지와 권익을 위해 일하는 기관, 뉴욕농아인교회’가 있다고 알아 주신다면 감사하다.”

-목사란 무엇인가
“목사는 성도다. 목사가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본다. 성도와 똑같다. 목사 스스로 성도가 되고 성도의 눈높이를 맞춰주는. 그렇다고 목사의 직함이나 권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까.” 


한인이 중심이 되어 뉴욕에 농아인교회가 설립된 것이 최초이고, 뉴욕농아인교회에서 진행되는 많은 농아인 관련 프로그램은 뉴욕 최초가 많다.

“뉴욕에서 가장 가까운 선교지는 뉴욕농아인교회다”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먼 길의 출발도 내 발 밑에서 시작된다.

가끔 격려 전화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917-991-0703.

이승우 기자 newyork@kukmin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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