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열 목사 “뉴욕은 세계 선교 거점이자 가교 역할의 중심”

미주국민일보-국민문화재단 공동기획

목회자 탐방<4> 뉴욕영안교회 김경열 목사(뉴욕실버선교회 훈련원장, 회장 김재열 목사)   



교육학을 전공한 선생님이 목사가 됐다. 또 선교사가 됐다.

아홉 형제 중 여섯 째인 김경열 목사는 집안의 반대에도 처음으로 교회에 다녔다. 그리고 교회 개척, 필리핀•중국 선교, 남들 보다 늦게 뉴욕에 왔다.  

2년 전 서울 영안교회 지교회를 설립 후 전문분야인 선교로도 사역을 다지고 있다. 시간과 공간의 변화엔 부침이 있기 마련인데 김 목사는 타이밍이 절묘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 강조했다.

서울 영안교회와 함께, 뉴욕의 여러 교회와 함께 영성 회복을 기도하며 중남미 연합 사역을 위해 뛰고 있다. 

“뉴욕만한 세계 선교의 최적지는 없다”고.  


불교 집안 반대 무릅쓰고 신학 공부
개척, 선교 이어 영안교회 지교회 설립


-뉴욕영안교회 설립 계기는.
“서울 영안교회 양병희 목사와는 전혀 아는 관계가 아니었다. 양 목사가 2013년 할렐루야대회에 강사로 오셨다.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 목사에게 ‘목사님, 제가 뉴욕에 영안교회를 만들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좋다’라고 했다. 

그리고 서울로 찾아갔다. 하지만 주위에선 말렸다. 아는 사이도 아니고 인사치레로 얘기한 걸 믿으면 어떡하냐고.

서울 도착 1주일 후 겨우 연락이 닿았다. 양 목사에게 뉴욕에서 왔다고 했더니 ‘왜 그러시죠’라고 반문했다. 그래서 지난번 뉴욕에서 꺼낸 교회 얘기를 해드렸더니 기억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바로 교회로 찾아갔다.

‘목사님,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안 하셨다면 제가 뉴욕에서 왔겠습니까. 그 말씀을 믿고 왔는데’ 하니 양 목사도 난처해 했다. 그러다 양 목사가 오늘 저녁에 우리 교회(서울 영안교회)에서 설교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양 목사는 오늘 설교로 은혜가 되면 돕겠지만 아니라면 없던 일로 하자고 했다. 긴장한 상태로 설교를 마치자 바로 양 목사가 올라와서 ‘우리 뉴욕에 지교회 세웁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즉석에서 헌금을 했다.

그리고 뉴욕에 돌아와 교회를 개척하게 됐고 2016년에 파송식도 했다.  

교회 개척 첫 해 베이사이드에 간판도 없이 4명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여러가지 제약이 있어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2016년부터 이곳에서 예배를 드렸다. 지금까지의 시간은 모두 하나님의 역사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거다.”

-신앙 생활 시작은.
“난 충북 영동 ‘깡촌’ 출신이다. 신작로는 커녕 자전거길도 없었다. 당연히 교회도 없었다. 경부고속도로가 나면서 전기가 들어오고 도로가 생겼다. 그리고 난 대학 다닐 때까지 교회에 가본적이 없다.

그 순간에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우리집에 복음이 들어오게 됐다. 내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 우리 마을에도 교회가 생겼다. 그 조그만 마을에. 난 목사가 되기 전 고등학교 선생을 했다. 뉴욕한민교회 김정국 목사가 순복음신학교 시절 스승님이다.” 

-가족의 반대를 어떻게 극복했나.
“처음에 교회를 다닌다고 하니 집안 사람들이 모두 반대했다. 우리 집은 불교 집안이었다. 대학시절 친구 따라 교회를 가기 시작했다. 어느날 교회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예배를 마친 목사가 나에게 와 예수님이 나 때문에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황당했다. 왜 나 때문일까. 하지만 그게 나에겐 엄청난 도전이었고 부르심이었다. 그 말씀이 계속 맴돌았다. 

그리고 방학 때 집에 갔는데 아버님이 우리 마을에 교회가 생긴다고 말씀하셨다. 난 우리 마을에 교회 생겨도 망할 것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가 망한다고 주민들도 경계했다. 그러나 내가 교회 다니는 걸 반대하시던 아버님이 ‘우리 아들이 교회 다니는데 교회 생겨도 동네 안 망한다’고 말하며 교회 입구의 우리 땅 일부를 무상으로 줬다. 

아버님도 변하시는 걸 보니 이게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생각했다. 그 후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됐을 때 동네가 복음화되기 시작했다. 내 형제가 아홉 명인데 세 명이 목사를 하고 있다. 매형•조카 중에도 목사가 있다.” 

-목회 시작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 가족들은 ‘집안 망한다, 교회에 미쳤다’고 했다. 멀쩡한 교직을 그만둔다고 했으니.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를 하신 것이다.

목회를 두고 고민하던 방학 때 25일간 금식기도를 하며 결판을 내기로 했다. 기도 마지막 날 하나님께서 나에게 환상을 보여주셨다. 당시 다니던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님께서 내 꿈 얘기를 듣고 ‘할렐루야,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야’라고 말씀하셨다. 곧바로 목회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돈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결혼할 때 집에서 10만원도 안 줬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교회를 개척한다고 누가 돕겠는가. 오로지 기도만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연탄공장 관계자를 만나 교회 개척을 위한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더니 다음 날 선뜻 빌려줬다.”


화산 폭발한 필리핀 이재민 보고 충격
교회 사임 후 바로 선교사로 나서


-교회 개척과 선교 경험이 많은데.
“이것도 하나님의 역사다. 1986년 인천에서 교회 개척 5개월 만에 교인이 150명으로 늘었다. 그 후 돈을 빌려준 사람도 나중에 아들을 얻더니 ‘교회에 돈을 빌려줬더니 하나님이 아들을 주셨다’고 여겼다. 이것도 전도가 됐다. 당시 교회에 전도사가 12명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개척을 부천에서 했다. 그 후 필리핀으로 눈을 돌렸다. 1992년 필리핀에 화산이 폭발한 후 그곳에서 이재민 사역하는 전도사를 만났다. 사역하는 모습을 보고 ‘난 가짜구나’ 하고 느꼈다. 선교사들을 바라보니 난 잘못된 신앙인이었구나. 그래서 교회를 사임하고 선교사로 갈 생각을 했다. 

교회를 사임하고 세계오지선교회를 만들어 필리핀에 갔다. 또 2002년 중국 연변의 종교국장과 인연으로 중국의 종교법 등을 잘 알게 됐다.

그해 12월에 중국에 갔다. 세계오지선교회 회장으로 방문 후 선교지를 중국으로 옮겼다. 중국에서 활동은 양로원을 매입해 복지사역을 8년 했다.

그리고 2012년 미국에 왔다. 2013년 초 KAPC 교단 본부 선교사로 일하다 2014년 뉴욕업스테이트 시라큐스의 한 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다시 뉴욕으로 내려와 뉴욕영안교회를 개척했다. 뉴욕실버선교회의 훈련원장도 맡게 됐다.”

-뉴욕실버선교회 훈련원장을 맡고 있다.
“2016년부터 실버선교 훈련원장을 맡게된 후 강사를 목회를 잘 하고 선교 마인드가 있는 사람으로 교체했다. 실버미션이 잘되는 선교단체 중 하나로 성장했다.”

-뉴욕실버선교회 성과는.
“지금까지 700여 명이 수료하고 선교지 다녀오신 분이 800여 명이 된다. 실버선교회 출신으로 현지에서 직접 사역을 하시는 분이 13가정이 있다. 1회 때부터 한 번도 안 빠지고 참석하는 분도 있다. 선교회 평균 나이가 70세다. 80대 이상도 세 분 있다. 

원주민선교도 준비한다. 북미원주민선교회 이재봉 목사가 협업을 요청했다. 선교단의 주축인 청소년은 나이 많은 원주민을 상대하기 편치 않다. 그래서 이번부터 실버선교회와 같이 한다.”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나.
“설교는 말씀을 중심으로 한다. 정치 등 그런 건 전혀 포함 안 한다. 오직 성경이다. 매주 설교를 카카오톡으로 7천명에게 보낸다. 7천명에게 보내면 500~600명이 답을 보내온다. 이것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다.

주일 설교를 끝내면 내용을 화요일까지 카카오톡으로 보낸다. 설교를 못하는 주에도 보낸다. 다른 목사님들에게도 보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목사님들이 보고있다 생각하면 더 열심히 할 수 밖에 없다.”



서울-뉴욕 영안교회는 시스템 공유하는 ‘하나’
개인 교회가 아닌 중남미 선교 거점 역할


-서울 영안교회 양병희 목사와 관계는.
“2주년 기념예배에 오셔서 작은 규모의 교회를 보고 자기가 개척하던 시절이 생각난다며 좋아하셨다. 그리고 매년 오시라고 부탁했다. 그래야 성도들도 힘을 얻는다고. 우리 교회는 양 목사와 연결돼 있어야 한다. 내년에 서울 영안교회 중고생과 청년 수련회를 뉴욕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맨해튼 등에 직접 나가 복음을 전하는 훈련을 맡겠다고 했다. 아이비리그 대학 투어도 약속했다. 오는 10월 한국에 가서 구체화 할 예정이다.”

-서울 영안교회 지교회의 의미는.
“처음 서울 영안교회 양병희 목사 앞에서 ‘영안교회는 희망입니다’ 라는 설교를 했다. 양병희 목사가 설교하실 때 늘 그러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영안교회는 우리의 희망입니다’라고. 양 목사는 설교 제목을 그렇게 정한 이유를 질문했다. 

그래서 내가 ‘목사님, 우리 교회는 세계를 넓혀가고 있습니다. 뉴욕영안교회는 그냥 교회가 아니라 영안교회의 거점과 다리 역할입니다. 중남미와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뉴욕영안교회가 그 역할을 하기 위해 필요한거지 개인적인 교회를 만들고자 하는 마음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난 이런 방법으로 교회를 만들어가야 교회가 산다고 본다. 서울과 뉴욕이 목소리가 다르면 안된다. 뉴욕에 있는 영안교회를 통해 중남미 등 세계로 뻗어가는데 심장 역할, 거점 역할을 해야한다. 

선교는 협력이고, 거점이고, 다리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 역할을 감당하는 곳이 뉴욕영안교회다. 사실상 서울과 한 교회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큰 파장을 일으키며 움직일 것이다.”

-뉴욕영안교회 현황은.
“성도가 20명 정도다. 규모는 작지만 양병희 목사가 일 할 터전을 준비하는 것이다. 내가 앞서 나가며 일하지 않는다. 우리 교회는 서울 영안교회 교육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한다. 모든 것은 서울과 같다.” 

-목회 철학이 다를 수 있지 않나.
“양병희 목사를 당회장이라 생각하고 맞춘다. 그리고 실버선교 등 전문적인 선교를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다. 앞으로 중남미 선교도 확대할 계획이다. 모토가 ‘뉴욕을 선교 도시로’다. 뉴욕에서 선교팀이 떠날 때 응원하고 기도하는 문화를 만들고 싶다.”  

-뉴욕영안교회 사역 중심은.
“선교다. 개인적으로 영성회복을 중심에 둔다. 항상 ‘마지막’은 선교하기 위해 하는 것이다. ‘중남미는 미국에서, 아시아는 한국에서, 아프리카는 유럽에서’ 등 지역 안배로 효율적인 선교를 하는 것이다.“ 

-뉴욕의 교회들도 중남미 선교를 많이 가는데.
“사실 선교는 연합이 좋다. 연합 사역은 시너지가 있다. 각 교회 선교 대표들이 뭉치면 힘이 생긴다. 선교 관계자들을 만나면 각자의 교회가 단독으로 간다면 한 번은 연합으로 가자 제안한다. 그래야 뉴욕을 선교 도시로 만드는데 기초가 된다.“

-목사란 무엇인가.
“특별한 게 없다고 본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듯이 단지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다. 내가 무엇을 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주님이 살아야 하고 주님의 일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그리운게 눈물•콧물 흘리며 기도하던 뜨거운 예배가 그립다. 우리 교회도 그렇게 되길 바란다. 뉴욕 교계도 그렇게 해야 산다. 영성 회복이 되어야 한다.” 

-다른 준비하는 사역이 있다면.
“섬기는 목회도 하고 싶다. 미국에 살며 30~40년 동안 한국을 한 번도 못 가본 분들이 많다. 한국방문 프로그램을 해보고 싶다. 입양인 등 신분 해결이 안되는 등 심각한 문제가 많다. 교회가 이들에게 힘이 됐으면 좋겠다. 앞으로 이민자들을 끌어안고 같이 가는 교회가 되길 희망한다.” 

이승우 기자 newyork@kukminus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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