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서부극 영화가 하나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각본을 쓰고 감독을 맡고 주연까지 해낸 ‘용서받지 못한 자(The Unforgiven·1992년 개봉)’. 주인공 윌리엄 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잔혹하기로 유명했던 살인자였다. 사람을 죽일 때마다 술을 마셨고, 술에 취해 아내까지 살해하고 말았던 인물이다. 사고였지만, 그 사건 이후 윌리엄은 무법자 생활을 청산하고 농장에서 고된 노동을 하며 남겨진 아이들을 키운다. 스스로 ‘절대 용서받지 못할 자’라고 여기고, 밤마다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얼굴을 악몽으로 꾸며 살아간다.
어디에도 그를 구원해줄 이는 없었다. 쓰레기 같은 자신의 과거를 꼭꼭 숨겨둬야만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밑바닥 인생이었을 뿐이다. 어느 날 선술집 호스티스가 불한당 한 명에게 얼굴을 난도질당하자, 갑자기 그의 가슴은 분노로 가득찬다. 불한당에게 거액의 현상금이 걸렸고, 예전 함께 범죄를 저지르던 동료가 찾아와 “그놈을 죽이고 현상금을 나눠 갖자”고 하자, 윌리엄은 또 권총을 허리춤에 찬다. 가슴속엔 “아이들 둘 키울 돈만 마련하면 되지”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마침내 불한당을 죽일 순간이 다가오자, 윌리엄은 총을 쏘지 못한다. 유명한 총잡이였던 그의 손은 총을 떨어뜨릴 정도로 떨린다. “사람을 죽이는 건 그 사람의 모든 것과 미래를 빼앗는 거지.”
거꾸로 불한당에게 총격을 당한 윌리엄은 말을 타고 도망친다. 그의 눈은 죽은 아내 생각으로 가득해 보인다. 그 순간 뜻밖의 구원을 얻는다. “당신이 나를 용서하지 못해도 당신을 사랑해.” 그렇게 오랫동안 품었던 결심 하나가, 아내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용기’를 선사한 것이다.
부모는 자신들의 피로 낳은 자식으로부터 수없이 배신당하기도 한다. 그 배신이 배은망덕할 정도로 큰 것이든, 사소한 거짓말과 무시이든 말이다. 하지만 절대 그 자식을 버리지 않는다. 가슴속으로 피붙이의 모든 잘못을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사랑은 유한(有限)하기 그지없다. 피붙이를 넘어선 타인들에게 무한정의 용서와 사랑을 줄 능력을 가진 인간은 거의 없다. 하나를 용서하면 또 하나가 증오로 남는 게 인간 세속의 일상사다. 역사가들은 인간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 ‘복수와 정복’의 반복이라 얘기하곤 한다. 뭔가를 이루기 위해선, 성공하기 위해선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일어서야 한다는 게 교훈일 정도다.
10년 전쯤의 일이다. 사소한 잘못을 놓고 옥신각신 아내와 다투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집을 뛰쳐나와 한참을 바깥에서 서성였던 적이 있었다. 큰아이가 그런 나를 보더니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와 “아빠, 왜 그래요”라고 물었다. “엄마 아빠가 서로를 미워해서 그래. 용서하질 못해서 그래.” 무심코 그렇게 대답했더니, 녀석은 “내가 둘 다 용서해줄게요”라며 나를 꼭 안아줬다. 여섯 살짜리 사내아이의 조그만 가슴에 안겨서 넋을 놓고 있었다. 녀석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말할까, 한참 생각하다 내린 결론은 “버릴 수 없는 사랑 때문”이란 것이었다. ‘진짜 용서’를 받아본 사람은 그 용서를 다른 에너지로 변화시킬 수 있다. 참회하고 벌떡 일어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살아볼 용기 말이다.
이제 곧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사건을 기념하는 날, 부활절이 다가온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버릴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모든 이의 죄를 용서하신 분이다. 그 용서가 너무나 커서, 완전무결하게 무한(無限)해서 우리는 감히 그를 통해 구원을 얻기를 소망한다.
구원이란 이 얄팍한 세상에서 잘 살아가는 수단과 방법을 얻는 게 아니다. 내가 아닌 남에게도 ‘나 혼자 몰래 나를 내가 용서했듯이’ 그런 사랑과 용서를 나눠주는 게 아닐까. 죄를 짓고 그 죗값을 치르고서도 간절히 신의 용서를 바라는 일이 아닐까. 해마다 부활절 즈음엔 매서웠던 겨울을 용서하는 부드러운 봄의 바람이 불어온다.
신창호 종교기획부장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