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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포커스-양기호] 오사카를 다시 생각한다



‘드루킹’ 사건에서 일본 오사카 총영사 인사 청탁이 드러나면서 오사카가 자주 도마에 오르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전 한국인에게 오사카는 매우 큰 중심지였고 지금도 그렇다. 전쟁 전 도쿄보다 두 배나 공장이 많았던 오사카에 조선인들이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집단 이주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39년 오사카 거주 조선인은 21만명으로 부산시 인구보다 많았고 평양시와 비슷할 정도였다. 요즘 오사카에 살고 있는 한국인은 10만4000명으로 도쿄보다 많고, 전체 재일교포의 22%에 달한다. 작년 한국인 관광객은 241만명으로 매일 6000명 이상 오사카를 찾은 셈이다.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는 오사카, 교토, 나라에 집중됐었다. 백제, 신라, 고구려의 사신들은 당시 나니와(難波)로 불렸던 오사카에 도착, 일본 고대 왕국과 만남을 이어갔다. 2001년부터 매년 11월 초 열리는 오사카 왓소문화교류협회 주최의 왓소 축제는 고대 한반도와 일본의 교류를 재현한 것으로, 양국 정상이 축하 메시지를 보낼 정도로 상징적인 행사가 됐다. 서울과 도쿄에서 한·일 축제 한마당이 매년 가을에 열린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는 오사카에서 한·일 간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한국인의 도쿄 집중은 지나치게 심하다. 특히 한·일 국제 심포지엄과 세미나 등 지적 대화는 대부분 도쿄에서 열린다. 아예 명칭을 서울-도쿄 포럼으로 정한 경우도 있다. 오사카와 간사이(關西)는 한·일 관계에서 독립변수라기보다도 종속변수에 가깝다. 제2위 위상을 지닌 항구도시라는 점에서 부산과 오사카는 비슷하다. 그러나 부산은 가까운 후쿠오카를 파트너로 선택했다.

전쟁 전 도쿄를 능가했던 오사카는 전후 도쿄에 완전히 밀렸다. 총리 관저와 중참 양원의 국회, 최고재판소의 도쿄 입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대부분 대기업은 고도성장기 이후 도쿄로 본사를 옮겼다. 2016년 외국인 숙박객 숫자로 보면 도쿄는 1800만명인데 오사카는 1001만명이다. 아시아 도시경쟁력 순위도 도쿄가 4위, 오사카는 23위다. 오사카의 굴뚝산업은 도쿄의 IT산업으로, 주요 대학은 도쿄대와 교토대에서 소위 3대 명문인 도쿄·와세다·게이오대로, 하네다와 나리타 공항은 일본의 국제관문으로 자리 잡았다. 오사카는 야구의 한신 타이거즈, 대형 연예기획사 요시모토흥업, 귀금속을 온몸에 걸친 졸부의 대명사로 바뀌었다. 대학마저 오사카대학보다 교토대학이 간사이 지역을 대표하고 있으며, 중산층과 부자들은 떠들썩한 상인도시 오사카를 떠나서 고베 언덕으로 거주지를 옮긴 지 오래다.

그러니 2011년 오사카의 부활을 내세우며 하시모토 도루 시장이 당선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는 물러났지만 오사카시(大阪市)와 오사카부(大阪府) 단체장은 일본유신회가 차지하고 있다. 하시모토 전 오사카 시장은 오사카부와 오사카시를 합쳐서 도쿄도와 비슷한 오사카도(大阪都)를 만들자고 주장해 왔다. 도쿄 대 오사카의 양극 중심으로 가자는 것이다. 오사카가 상대적으로 낙후된 것은 사실이지만 오사카, 교토, 고베를 합친 간사이 경제권은 터키나 네덜란드 국내총생산에 육박할 정도이다. 노벨상 수상자로 비교하면 도쿄대학이 8명이지만, 교토대학도 6명이다. 간토 대 간사이 경쟁구도가 분명히 존재하고 있으며, 간사이 출신 일본인들은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고대 이래 한반도는 오사카 지역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다. 오늘날 수많은 재일교포가 거주하고 있으며, 수백만명의 한국인이 오사카를 방문하고 있다. 도쿄 못지않게 오사카의 잠재력이 크고 한반도와의 인연도 깊다. 도쿄 중심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오사카의 잠재력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 오사카를 다시 보고 있노라면, 역사와 문화면에서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서울-오사카 포럼, 부산-오사카 포럼을 만들어가야 하는 이유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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