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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 산다] 제주에선 다 된다



제주공항에는 비행기에서 방금 내린 관광객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일상에서 벗어났고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있고 기대했던 스케줄이 기다리고 있다. 방금 하늘에서 푸른 바다와 한라산을 보았던 터다. 즐거운 표정으로 발길을 재촉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덩달아 흥겨워진다. 이들이 제주시내에 나타나면 거리 패션이 화려해진다. 여자들은 잠자리 날개 같은 옷감을 끈으로 어깨에 걸친 원피스를 입거나 반드시 어깨가 나오는 티셔츠, 짧은 반바지를 입는다. 시원하기 위해 얇게 입는 건지 노출 경쟁을 위해 짧게 입는 건지 딱히 경계는 없지만 상스럽지 않고 싱그럽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분명한 건 자기 거주지에서는 절대 이렇게 입지 못한다는 거다.

모자는 어떤가. 평소에 쓰지 않던 모자를 하나씩 쓴다. 왜냐면 여행 중이니까. 쉽게 집어 들 수 있는 야구 캡, 밀집 소재의 파나마햇, 그보다 챙이 넓은 플로피햇, 등산할 때 많이 쓰는 벙거지형 버킷햇, 더운데 억지로 참는 건 아닌지 늘 궁금한 비니까지 모자 하나씩은 들고 온다. 햇빛을 가리기 위한 건지, 멋을 내기 위한 건지 구분할 수 없지만 이 또한 일상에선 절대 쓰지 않는 것들이다.

여행은 일탈이다. 제주는 여행지다. 제주에서는 입고 싶은 옷, 쓰고 싶은 모자 다 된다. 양말 없이 신발을 신으면 절대 안 되는 줄 알고 평생 살았던 나는 요즘 맨발로 운동화를 신는다. 땀에 젖은 셔츠를 보이면 절대 안 돼 반드시 러닝셔츠를 입었던 세대인 나는 요즘 러닝셔츠가 없다. 다 되는 제주도에 사는 덕이다.

내가 사는 하도리 옆 세화리 포구에선 매주 토요일 벼룩시장 벨롱장이 선다. 보통 70∼90개 좌판이 방파제를 따라 펼쳐진다. 귀고리 팔찌 등 액세서리, 도자기 소품, 제주를 그린 그림과 엽서, 알프스 소녀가 입었을 듯한 원피스와 손으로 짠 모자, 식탁에 올려놓고 싶은 목공예 도마, 손톱보다 작은 조개들을 모아 만든 그림, 손수 만든 잼과 쿠키 등 갖고 싶지 않은 게 없다. 여기에서 제주로 이주한 젊은이들이 구석구석 흩어져 무슨 일을 하고 사는지 읽을 수 있다. 왜 사는지 모르며 출퇴근하는 직장생활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 잘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만은 분명하다.

벨롱장 수공예품은 자치단체나 관광 기관, 사업자 이익단체인 무슨 진흥협회 등이 임대료 비싼 상가나 관광지에서 특산품점이라고 가게를 열어 팔던 돌하르방, 폭포 사진, 엽서 세트와는 다르다. 공공이 기존 카테고리에 갇혀 있는 동안 이 젊은이들이 다 되는 제주에서 틀을 벗어난 값진 실험과 재능으로 관광상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틀을 벗어나 본 사람은 안다. 그 자유로움의 가치를. 신기한 것은 소비자도 그것을 안다는 것이다. 벨롱장뿐이겠나. 버려졌던 돌집을 고쳐 손수 커피를 내리는 커피숍, 한치를 한 마리 얹은 떡볶이, 성게 알을 넣은 김밥 등 식음료에서 실험이 이어지고 공연, 전시, 체험 등 제주 문화 전반에서 일탈을 특권으로 한 도전과 실험이 활발하다. 제주는 커다란 벤처단지다.

도전이 다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벨롱장 좌판 장사가 그들의 목적지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몸부림이 정부도 못하는 일자리를 이미 스스로 만든 것이고 무한 도전은 더 높은 국민총생산을 견인하고 있다. 다 되는 가능성의 섬 제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박두호 전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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