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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남호철] 폭염, 피서 그리고…



서울에 18일째 열대야가 이어지는 등 전국적인 폭염으로 한반도가 ‘불반도’가 됐다. ‘111년 만의 기록적’ ‘사상 최악’ ‘유례없는’ ‘역대급’ 등의 수식어만 봐도 무더위가 얼마나 맹위를 떨치고 있는지 실감 난다. 여름철 피서는 필수가 됐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정자에 모여 시를 읊거나 책을 읽으며 더위를 잊었다. 20세기 들어서는 1913년 일본인들이 부산에 송도해수욕장을 개설하면서 해수욕이 새 피서법으로 등장했다. 이후 유명 피서지나 관광지로 여행을 떠나고, 대규모 물놀이 공원을 찾는 새로운 피서 풍습이 더해졌다. 불볕더위와 열대야를 피해 떠나는 행렬이 고속도로와 국도를 메우고, 공항이 만원을 이루는 모습이 일상화됐다.

정부는 여름휴가철마다 ‘국내 여행을 떠나자’는 캠페인을 벌인다. 해외로 나갈 여행객이 국내 농산어촌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면 지역경제 활성화 및 내수 진작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올해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국내 여행을 떠나는 근로자에 대해 휴가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근로자가 20만원을 분담하면 기업과 정부가 함께 각각 10만원을 지원하는 것으로, 중소기업 근로자 2만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문제는 국내 피서지에 도착하면 더위보다 더 짜증 나게 하는 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바가지요금이다. 국내 유명 계곡이나 이름난 해변 등을 찾으면 여유는 고사하고 스트레스만 받는다. 계곡을 찾으면 물놀이할 곳으로 내려가는 길목마다 식당들이 자리 잡았다. 식당에 음식을 주문해야만 계곡물 접근이 가능하다. 해변에 설치된 파라솔은 지방자치단체가 정한 가격을 훌쩍 넘기 일쑤다. 직접 가져온 텐트나 파라솔을 치더라도 비싼 자릿세를 내야 한다. 정부가 성수기를 틈타 바가지요금을 받는 식당을 단속하는 등 휴가철 피서지 물가 관리에 나서지만 ‘눈 가리고 아웅’ 때문에 바가지요금 논쟁은 휴가철·연휴 때마다 되풀이되고 있다. 피서객들은 ‘충전’하러 떠났다가 ‘방전’돼 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최근 여름휴가의 트렌드가 바뀌고 있다. 무더운 날씨 속에 교통체증을 겪으며 짜증 속에 떠나는 피서보다 도시 속에서 시원한 쇼핑몰이나 극장 등에서 나만의 피서를 찾는 사람들이 늘었다. 아예 집에만 있는 ‘방콕’ 생활로 더위를 이겨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백캉스(백화점+바캉스) 몰캉스(쇼핑몰+바캉스) 홈캉스(집+바캉스)’ 등 신조어도 탄생했다. 산·바다·계곡 어디를 찾아가도 기록적인 더위를 식힐 수 없다는 판단에 여름휴가 여행은 낭만이 아니라 고생이라는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시원한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내는 북캉스(책+바캉스)족도 늘어나고 있다. 책을 읽으며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를 일컫는 ‘북스테이’도 각광받고 있다. 카페에서 여유를 즐기며 피서를 즐기는 커피서(커피숍+피서)족도 등장했다. 무더운 여름을 피해 시원한 계절에 휴가여행을 즐기겠다는 사람도 늘었다. 여름휴가 시즌엔 국내 여행 경비가 많이 필요해 비수기 시즌에 해외여행을 하겠다는 것이다.

불볕더위에 불황이 보태지며 야외 피서객이 자취를 감추면서 ‘바캉스 특수’가 사라졌다. 해수욕장 주변 거리는 휴가철이 무색할 정도로 한산해졌다. 여름 대목이 사라진 해수욕장 상인들은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해까지 인산인해를 이루던 해수욕장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해변 모래사장의 파라솔은 텅 빈 채 손님을 마냥 기다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폭염 탓이라고는 하지만 ‘한철 장사’를 하는 상인들의 자업자득이라는 얘기도 적지 않다.

여름휴가는 달콤한 휴식이다. 바다든 산이든 계곡이든 도심이든 국민들은 진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을 찾는다. 휴가지 상인들은 올해 여름의 불황을 폭염 탓으로 돌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피서지를 찾아 떠나지 않는 피서객들의 마음은 이미 많이 달라져 있다는 것을 곱씹어봐야 한다.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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