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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자동차 심리학



과시욕이 만든 수입차 선호 연비조작 폭스바겐은
이를 딛고 부활했는데 불타는 BMW도 그럴까
해외 자동차 시장서 나타난 ‘녹색 소비’ 과시 현상
한국 소비자의 욕구도 머잖아 이렇게 발현되기를


애플의 스마트폰 가운데 전문가 평가와 소비자 반응이 가장 엇갈렸던 것은 2013년 아이폰5S였다. 외형은 전작인 아이폰5와 같았고 운영체제를 바꿨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혁신이 사라졌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그런데 출시 사흘 만에 900만대나 팔려 아이폰5의 500만대 기록을 우습게 갈아치웠다. 당황한 전문가들이 허겁지겁 분석해 찾아낸 비결은 색깔이었다. 검정과 은색이던 전작과 달리 5S는 그레이 골드 실버의 세 가지로 만들어졌다. 특히 골드는 판매 개시 10분 만에 매진됐다.

골드 5S의 품귀현상은 두 가지 해석을 낳았다. ①사람들은 내 아이폰이 최신형임을 남들이 알아주길 원한다. 애플이 5S에 처음 도입한 금색은 얼핏 봐도 ‘최신 아이폰 쓰는 사람’임을 알 수 있게 해줬다. ②사람들은 좋은 제품보다 ‘있어 보이는’ 제품에 더 끌린다. 골드 5S는 중국에서 가장 많이 팔렸다. 금을 부(富)의 상징으로 여기는 중국인의 인식이 크게 작용했다. 스티브 잡스가 IT에 인문학을 접목하며 발견한 소비의 본질은 아마 과시욕이었을 것이다. 그는 디자인을 통해, 팀 쿡은 좀 더 노골적으로 색깔을 활용해 이를 채워줬다.

이렇게 남의 시선을 겨냥한 소비 사례는 무수히 많다. 명품백이 그렇고, 무거워만 보이는 고급 손목시계가 그렇다.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자동차다. 삶의 일부가 된 차는 그 주인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심리학자 수전 헤니는 ‘차가 당신에 대해 말해주는 11가지’를 정리했다. 짙은 빨간색 차를 타는 사람은 고위험 금융상품에 과감히 투자할 가능성이 크고, 밝은 LED 전조등을 달았다면 자의식이 매우 강한 사람이라고 한다.

한국인이 차를 선택하는 기준은 이중적이다. 색깔을 고를 때와 크기를 결정할 때 상반된 판단을 내린다. 색은 가급적 튀지 않는 것을 택하고 가능하면 큰 차를 타려는 경향이 뚜렷하다. 현대자동차 컬러팀은 1994년 엑센트를 출시하며 낭패를 봤다. 파스텔톤의 보라 초록 분홍을 처음 적용했는데 공장 탱크에 채워둔 페인트를 1년 만에 모두 버려야 했다. 신선한 색상이 좋다던 고객도 정작 사간 것은 죄다 흰색 은색 아니면 검정이었다. 이 추세는 굳건히 이어져 지난해 판매된 그랜저 쏘나타 아반떼의 무채색 점유율은 90%를 넘었다.

무채색 선호현상도 남의 시선이 만들어낸 소비였다. 색에 담긴 심리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렇게 말한다. 빨간 차를 타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튀는 색깔로 주목을 끌면 범죄 타깃이 되지 않을까 싶어 무난하고 안전한 색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과시욕이 제거되는 건 아니어서 색상 대신 크기가 차를 과시하는 방법이 됐다. 올 상반기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는 그랜저였다. 싼타페가 뒤를 이었고 부동의 베스트셀러였던 쏘나타는 6위로 밀려났다. 그랜저는 지난해에도 1년 내내 판매 1위를 달렸다. 자동차업계 사람들은 대형차의 약진에 “세계적으로 유례가 드물다”며 놀라워했다.

남의 시선을 의식해 무채색 차를 타면서 남의 시선을 겨냥해 큰 차를 사던 사람들은 언제부턴가 수입차에 눈을 돌렸다. 국내 수입차 판매량은 시장 규모가 세 배나 큰 일본을 곧 넘어설 태세다. 벤츠코리아의 지난해 매출액은 쌍용차보다 많았다. 가격 유지비 애프터서비스를 생각하면 결코 경제적일 수 없는 소비인데, 이것을 추동한 힘의 상당부분은 과시욕일 것이다. 몇 해 전 폭스바겐의 연비조작 파동 때 오히려 판매량이 늘었던 건 소비자의 분노가 과시욕을 누르지 못해 나타난 결과였다.

연일 불에 타는 BMW는 어떨까. 폭스바겐처럼 화려하게 부활할 것인가. 상황이 좀 바뀐 듯하다. 안전 문제라는 점이 다르고, 무엇보다 수입차 시장에서 포르쉐 랜드로버 마세라티 같은 브랜드가 비약적 성장을 했다. ‘억’ 소리 나는 가격의 생소한 차들이 도로를 달리고 있다. 수입차가 너무 많아지니 익숙한 브랜드로는 제대로 과시하기 어려워 이런 차를 택하는 것일 테다. 과시의 수단이 되기에 BMW의 매력은 많이 낮아졌다.

과시란 말의 어감이 좋지는 않은데 남을 의식하는 소비가 꼭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미국 미네소타대학 블라다스 그리스케비시우스 교수는 혼다 어코드와 어코드 하이브리드를 놓고 소비자에게 어떤 차를 살지 선택하게 하는 실험을 했다. 그냥 어코드의 성능과 사양이 훨씬 좋았지만 하이브리드를 택한 사람이 많았다. 2006년 미국에서 하이브리드 세금 혜택이 종료된 뒤 프리우스 판매량은 오히려 68%나 늘었다. ‘환경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걸 과시하는 소비였다. 수입차의 희소성이 낮아지다 보면 한국 소비자의 과시욕도 이렇게 발현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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