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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고세욱] 오지환·박해민, 그 후



‘존버’는 ‘끝까지 버티자’는 뜻의 비속어다. 욕설이 들어간 표현인데 어감과 달리 서민 애환을 상징하는 단어로도 회자됐다. 지난해 열풍이 분 가상화폐가 폭락하자 투자자들이 외친 게 “존버!”였다. 또 불황에 직장인들이 어떻게든 살아남자며 건배사로 ‘존버’를 부르짖었다. 그런 존버가 올해에는 스포츠계, 특히 야구에서 화제가 됐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팀에 오지환 박해민이 뽑히면서부터다. 1990년생 동갑내기인 두 선수는 병역법상 지난해까지 군경팀에 지원했어야 했는데 이를 포기했다. 올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 병역 면제를 노린 것이었다. 국가대표가 되지 못하면 현역으로 복무해야 하는 도박과도 같은 선택이었다. 벼랑끝 작전이 통한 듯 둘은 프로 데뷔 후 첫 태극마크를 가장 절박한 시점에 달았다. 그동안 아시안게임의 경우 상대팀들의 수준이 워낙 떨어져 ‘대표팀 승선=금메달 획득’으로 여겨진 지 오래다. ‘존버 끝, 행복 시작’이 온 듯했다.

그러나 행복 시나리오를 그리고 있을 두 선수에 대한 대중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하다. 40여년간 수많은 대표팀 경기를 봐 왔지만 이번 야구 대표팀처럼 많은 이가 패배를 기원하는 현상은 처음 본다. 군경팀에서 야구를 하는 것도 특혜인데 이조차 피하기 위해 ‘존버’했다는 것이 거부감의 실체다. 26일 예선 첫 경기인 대만에 뜻밖의 일격을 당하자 각종 게시판마다 축하 메시지가 쏟아진 게 단적인 예다.

비록 예상 밖의 패배를 당했지만 약 5일 후면 둘의 목에 자랑스러운 금메달이 걸릴 가능성이 여전히 높다. 참가국 중 유일하게 프로 최정예로 꾸린 팀이 두 번 방심하리라 보지 않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후다. 후폭풍이 심상찮을 것이다. 두 선수가 리그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하거나 슬럼프에 빠진다면 ‘병역기피자’ 낙인에 따른 악성 반응이 무수히 나올 터다. KIA 타이거즈의 나지완이 부상을 숨기고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 참여했다가 지금까지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점도 둘의 미래를 예상케 한다. 존버의 결실이 되레 팬들의 비난을 견디기 위한 또 다른 존버로 이어질 판이다. 만일 대표팀이 금메달 획득에 실패할 경우 둘은 그야말로 게도 구럭도 다 잃는 만신창이가 될 수 있다. 이쯤 되면 선수나 구단은 버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가 됐다. 사회는 갈수록 공정함을 원하고 있다. 존버의 유혹을 끊으려면 현재의 손실을 감수하고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이른바 ‘손절매’ 선수의 성공사례에 눈길을 돌려야 한다.

두 선수와 동갑인 KIA 안치홍이 대표적이다. 안치홍은 인천아시안게임 당시 대표팀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탈락 직전 안치홍의 타율은 0.341. 대표팀 명단 확정 시점의 오지환(0.300)보다 4푼 이상 높았다. 안치홍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부상만 조심하면 동정표까지 더해 4년 후 대표팀에 뽑힐 가능성은 아주 높았다. “4년 더 존버” 하고픈 마음이 없었을까. 그럼에도 그는 그해 시즌을 마친 뒤 미련 없이 입대했다. 제대 후 안치홍은 지난해 소속팀의 우승에 큰 몫을 했고 올 시즌 현재 0.362의 역대 최고 타율을 보여주고 있다. 석연찮은 탈락 후 4년이 지나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이번 아시안게임 대표팀 주전으로 올라섰다. 대만전 멀티 히트로 존재감도 뽐냈다. 올해 연봉(3억2000만원)은 오지환과 박해민(둘 다 2억9000만원)을 넘어섰다.

개인의 의지에만 맡길 일은 아니다. 축구처럼 23세 이하로 아시안게임 출전 선수의 나이 제한을 둬서 존버의 시효기간을 대폭 줄여야 한다. 이는 아마추어와 실업팀이 주로 출전하는 아시안게임 참가국들과의 형평성 면에서도 필요하다. 행여나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못 딸 경우 자존심을 회복한답시고 고참 위주의 프로 선수에다 미필 선수들을 끼워 넣는 우를 보여선 안 될 것이다. 존버의 고통은 오지환과 박해민에서 끝나야 한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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