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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유성열] 고양이들의 도시


 
유성열 산업부 기자


짙은 어둠이 골목 구석구석 깔리면 빛나는 구슬들이 희번덕거린다. 물컹거리는 듯 만질만질해 보이기도 하는 보석 같기도 한 그것들은 예전에는 도둑고양이로 불렸던 길고양이들의 눈이다. 최근 들어 고양이들의 개체수가 대폭 늘어난 지역들이 있다. 오랜 시간 사람이 터를 잡고 살았지만 갑작스레 싹 비워진 곳. 재개발 구역이다. 그래도 낮 시간에는 사람과 차량이 돌아다니고, 건물을 부수고 짓는 공사 소음이 들린다. 때문에 이곳에 누군가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끔 한다. 하지만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건물마다 대문짝만한 X자가 붉은색 스프레이로 대강대강 그려져 있다. 또는 공가라는 글자가 적혀 있다. 빈 집이라는 뜻이다.

야행성이라고 하니 왠지 음습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동물. 해가 지면 검은 형체들이 거리로 나선다. 아마도 빈집에서 기어 나온 것이리라. 이 동네에 이렇게도 고양이들이 많았나 싶을 정도로 아깽이(아기 고양이)부터 노묘까지 어울려 북적댄다.

늘어난 개체수만큼이나 이것들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 신기하다. 본래 한국 길고양이들은 사람을 피한다. 고양이는 불길하고 재수 없는 동물이라는 편견이 강했기 때문에 호의를 받기란 쉽지 않다. 다른 이로부터 받은 스트레스를 나약한 고양이에게 화풀이를 하며 푸는 저열한 인두겁도 많다.

그런데 재개발 구역 고양이들은 사람이 지나가도 비키지를 않는다. 전조등을 켠 차량 정도가 가까이 오면 그제야 느긋하게 일어서 자리를 옮긴다. “밥 먹었니”라고 말을 걸면 어떤 때는 고개를 돌려 가볍게 대꾸까지 한다. 골목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애정행각을 벌이는 녀석들 때문에 멈칫하는 사람들, 장난을 치는지 싸우는지 모르겠지만 뒹구는 놈들을 쭈그려 앉아 구경하는 사람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워낙 반려동물 인구가 늘었고 특히 고양이를 키우는 가구가 증가하다 보니 사람들의 태도와 사회적 분위기가 많이 변하기는 했다. 그래도 이곳 길거리 고양이들의 달라진 행태는 주목할 만하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사람이 많고 적은 게 가장 큰 차이다. 인류는 언제 어디서든 주인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 다른 종에 짓눌려 살던 시절 기억은 역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고 의식 속에도 남아 있지 않다. 주변 환경을 장악하고 있던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고양이들이 갑자기 늘었고 습성까지 달라졌다.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 따위는 보지 않는 것 같다. ‘이제는 우리가 이 구역 주인 아닌가’하는 자신감이 감지된다.

평소 고양이라는 동물 자체를 좋아하고 두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데도 때로는 섬뜩하다. 우리는 정말 주인인가. 지금까지 그랬다면 앞으로도 주인 자리에 있을 것으로 자신할 수 있는가.

현재에 대한 불안은 인류의 본성이다. 수많은 문화의 원형에서 그런 두려움이 나타난다. 공상과학(SF) 영화를 통해 종종 묘사되는 디스토피아는 주로 인간이 자멸한 것이거나 다른 종족에 밀린 결과다. 리메이크 작품까지 성공한 영화 ‘혹성 탈출’의 경우 유인원이 우리의 자리를 꿰찬다. 입을 크게 벌려 사람을 향해 “노(No)”라고 일갈하는 똑똑해진 주인공 침팬지 시저의 분노에 찬 표정은 그것이 컴퓨터그래픽(CG)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소름이 돋는다. 유인원에 의한 인류 노예화보다 현실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설정은 인공지능(AI)의 반란이다. 이는 우리 손으로 만든 창조물이 우리를 배신한다는 측면에서 충격파가 크다. 그래서 문화 콘텐츠 제작자들의 단골 소재로 쓰인다.

개인적으로는 세기말 정서가 만개했던 1990년대의 영화 ‘터미네이터2’가 아직도 생생하다. 군사용 AI 스카이넷은 자신을 정지시키려 드는 인류를 적으로 간주하고 방위 시스템을 장악한 뒤 핵미사일을 발사한다. 인류가 대부분 죽고 이어 생존자들까지 제거당하면서 종말의 위기가 닥친다. 3년 전 개봉한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의 여운도 진하다. AI 로봇 울트론은 탄생 직후 역사를 되짚어본 결과 인류가 지구를 망쳤다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들을 몰살하기로 한다. ‘인류가 없어져야 세상의 평화가 온다’는 영화의 슬로건은 불쾌하지만 반박하기 어렵다.

과연 인간들은 이 세상의 주인 행세를 할 자격이 있을까. 앞으로도 주인의 권세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눈앞에 드러눕고 길을 막는 고양이가 비아냥거리며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유성열 산업부 기자 nukuv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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