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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원준 칼럼] 좋은 죽음



‘지독한 하루’는 응급의학과 전문의 남궁인씨의 두 번째 산문집이다. 하룻밤에 200명이 넘는 환자를 받고 그중 4, 5명에게 죽음을 선언하는 응급실의 일상을 그는 매일 기록하고 있다. 수많은 죽음을 상대하는 삶이어서 죽음에 둔감해지지 않기 위해 글을 쓴다. 지난달 페이스북에 적은 하루는 특히 지독했다. 새벽에 쓰레기를 치우던 환경미화원이 들것에 실려 왔다. 청소차에 깔려 장기가 다 뭉개져 있었다. 숨만 붙은 채 신음하던 이가 힘겹게 뱉어낸 말은 “내가 차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졌어요. 아, 아파. 내가 잘못해서…”였다. 의사의 사투에도 그는 숨을 거뒀다. 그 청소차를 몰던 동료는 오열하며 “따라 죽겠다”고 했다. 남궁씨는 고인의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내 잘못이라고 하셨습니다.”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타인이 겪을 마음의 고통을 헤아리는 죽음은 우리를 먹먹하게 한다. 남궁씨는 그런 죽음을 노인들에게서 종종 목격한다고 했다. 응급실에 환자가 실려 오면 그는 항상 “많이 아파요?”라는 말로 진료를 시작한다. 스스로 ‘가장 멍청한 말’이라 고백하면서도 이렇게 묻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공감해 보려는 시도일 테다. 이 질문에 대개는 자신의 아픔을 설명하는데 할머니 할아버지는 “참을 만하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많다. 곧 숨이 멎을지도 모르는 이들이 자식에게 걱정을 끼칠까봐 아픔을 묻어 둔다. 남궁씨는 “그렇게 살다가 치료시기를 놓친 분들에게 죽음을 선언할 때면 정말 눈물이 난다”고 했다. 그런 죽음은 앞선 삶을 담고 있다. 나보다 자식을 앞세우며 평생을 살았을 것이다.

서울대 의대 윤영호 교수팀은 말기 환자와 가족 등 4000여명에게 어떤 죽음이 좋은 죽음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끝까지 의식이 명료한 죽음’ ‘주변 정리가 마무리된 죽음’ ‘영적인 안녕 상태의 죽음’ 등 10가지 죽음을 제시했다. 가장 많은 답변은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이었다. 해외에서도 비슷한 연구가 있었다. 미국인은 ‘통증에서 벗어난 죽음’을 꼽았다. 영국인은 ‘익숙한 환경에서의 죽음’, 일본인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편안한 죽음’이 좋은 죽음이라고 했다. 모두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데 유독 한국인만 살아 있는 이들의 평안함을 좋은 죽음의 잣대로 여긴다. 까닭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한국인에게 가족은 나보다 중요한 것이고, 한국에서 죽음은 몹시 부담스러운 과정이다.

남궁씨는 한 인터뷰에서 물리적으로 가장 평온한 죽음의 목격담을 말했다. 90세 노인이 병원에 왔는데 약간의 치매 외엔 특별한 질환이 없었다. 입원 후 서서히 식사량이 줄더니 며칠 곤하게 잠만 잤다. 잠시 눈을 떠 아들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다시 잠든 상태로 숨을 놓았다. 이렇게 흔치 않은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죽음에는 병수발이 수반된다. 많은 병원비와 육체적 힘겨움과 심리적 고통을 초래하기에 죽음을 앞둔 이들이 그것을 부담하는 가족을 걱정하고 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살다가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나를 먼저 생각하지 못하는 한국인의 삶은 애잔하고 또 안타깝다.

2010년 세계 40개국을 상대로 실시한 ‘죽음의 질’ 조사에서 한국은 32위를 기록했다. 통증 완화 치료, 치료 환경, 인력, 치료의 질, 지역사회 참여 5개 항목을 점수화한 결과였다. 5년 뒤 80개국 대상의 같은 조사에선 18위로 껑충 뛰었다. 말기 암환자에 대한 항암제 투여가 줄고 진통제 사용이 늘면서 완화 치료 점수가 높아진 점이 크게 작용했다. 병수발의 방식을 바꾸면 죽음의 질도 나아질 수 있음을 말해준다. 간혹 죽음을 생각할 나이가 된 한국인은 선진국의 동년배보다 거친 삶을 살았다. 현대사의 풍파에서 가족을 지켜온 이들이니 가족을 앞세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죽음의 과정이 부담스럽지 않게는 해줄 수 있을 것이다. 13일은 호스피스의 날이다. 나를 기준으로 좋은 죽음을 떠올릴 수 있는 여건이 하루빨리 조성되기를 기대한다.

논설위원 wjta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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