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돋을새김-고세욱] 내 마음속 영웅들의 추락



# 태어나서 처음 야구장에 간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인 1980년 가을 황금사자기 고교야구 대회에서였다. 집에 세 들어 살던 부부의 손을 잡고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갔다. 광주일고와 천안북일고, 선린상고(현 선린인터넷고)와 세광고 간 4강전이 열렸다. 당시 좋아하던 이상군이 있는 천안북일고를 응원했는데 광주일고 투수의 공이 이상군보다 훨씬 빨랐다. “저 투수가 누구예요?” 같이 간 아저씨가 “저 투수를 몰라? 선동열이야”라고 했다. 꼬마의 눈에 선동열의 광속구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2년 후 서울에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한국과 일본의 결승전 전날. 다니던 속독 학원의 강사가 “일본이 선동열을 완벽히 분석했다”며 일본 우승을 예상했다. 곧바로 “선동열의 빠른 공을 일본 타자들이 못 칠 것”이라며 반박했다. 선동열의 호투와 한국 우승에 “그것 보세요”라며 강사 앞에서 우쭐댔다.

# 중학교 3학년 때이던 1985년.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TV로 농구 경기를 보다 한 선수의 플레이에 매료됐다. 중장거리슛만 봐오던 한국 농구에서 우아한 개인기와 돌파력, 어떤 각도에서도 슛을 넣는 기술을 봤다. 중앙대 허재였다.

실력 못잖게 경기가 안 풀리거나 판정에 수긍 못할 때마다 내뱉는 그의 욕설도 화제였다. 사춘기 시절이어서인지 허재의 반항적 태도는 묘하게 감정이입을 하게 만들었다. 그해 말인가 이듬해인가 친구와 함께 농구대잔치 ‘중앙대-삼성전자’전을 경기장에서 보려다 사정이 생겨 못 간 뒤 한동안 혼자서 ‘씩씩’ 거린 기억이 난다.

# 20년이 지난 2005년 이 둘에 대한 기억이 다시 소환됐다. 그해 초 선동열은 삼성 라이온즈를 맡으며 생애 첫 프로 1군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허재 역시 10월 전주 KCC의 지휘봉을 쥐며 초보 감독의 발을 디뎠다. 내 마음속 영웅들이 같은 해 선수가 아닌 감독으로 현장에 돌아온 것은 묘한 느낌을 갖게 했다. 선동열은 그해 바로 팀을 우승시켜 “역시”라는 탄성을 자아냈다.

개인적으로 선동열과 허재는 야구와 농구 분야에서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아니다. 다만 내게 해당 종목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처음 불러일으킨 존재였다. 둘은 국보, 대통령 소리를 듣는 불세출의 스타다. 게다가 선수와 감독으로도 모두 우승을 해볼 정도로 역량이 탁월했다. 꽃길만 걸을 줄 알았다. 그래서 2018년 여름 이 둘의 동시 추락은 예상 못한 일이었다.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야구와 농구 대표팀 감독을 맡은 선동열과 허재는 첫 단추를 잘못 채웠다. 바로 인선이었다. 선동열은 병역을 고의로 회피했다는 의혹을 가진 선수 몇몇을 뽑았고, 허재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태극마크를 달아줬다. 사실상 선수 선발 전권을 가진 두 감독의 선택에 국민적 비난이 쏟아졌다. 금메달을 놓친 농구대표팀 허 감독은 귀국 후 오명 속에 사퇴했다. 아마추어급 팀들을 상대로 졸전 끝에 우승한 선 감독에게선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리고 국회 국정감사에 ‘병역면제 의혹’ 증인으로 출석하는 수모를 겪었다.

교만이 화근이었던 것 같다. “이 분야에서 최고인 내가 선수들을 뽑는다는데 누가 뭐라 할까”라는 식의 생각이 지배하지 않았을까. 과거와 달리 세상이 공정성과 정의를 어느 때보다 강조하는 시대적 변화를 애써 외면했는지도 모르겠다. 선 감독은 아시안게임 전 논란이 된 선수들에게 “좋은 결과(금메달)가 나오면 국민들 마음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는 구시대적 사고였다.

국회의원들의 수준 낮은 질문들로 여론이 선 감독에 다소 우호적으로 변했지만 국감이 끝나면 잠복한 분노는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팬들의 눈높이를 따르는 겸손한 소통만이 추락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다. 아낌없는 재능 기부와 헌신도 필요할 듯하다. 영웅의 반성과 부활을 기대하는 사람은 기자만이 아니다.

고세욱 스포츠레저부장 swkoh@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