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송세영] 분노를 위한 분노



서울 이수역 주점 폭행 사건이 10년 전쯤 발생했다면 어땠을까. 심야시간 취객들의 단순 시비에서 비롯된 사건으로 치부되지 않았을까. 수사와 재판을 통해 시시비비는 가려졌겠지만 지금처럼 전국적인 화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 언론에 포착됐다 해도 ‘남성혐오 여성혐오 발언이 폭행으로 번졌다’는 정도의 가십성 기사로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이수역 사건에서도 드러났지만 사람들의 가치관이 다 같을 수는 없다. 특정한 가치관에 반대할 수도 있다.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 불편할 수도,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 자체가 싫을 수도 있다.

그러면서도 함께 살아가는 게 민주주의다. 하지만 불편함과 싫음 같은 감정이 분노를 품고 혐오하는 데 이르면 각별한 주의와 경계가 필요하다. 약간의 촉매만 있어도 폭력으로 비화될 수 있는 위험상태이기 때문이다. 이수역 사건에서도 ‘새벽까지 마신 술’ ‘비웃는 듯한 눈빛과 소곤거림’ ‘모욕과 비하 발언’ ‘제지하는 손동작’ 같은 사소한 계기들이 폭력을 불러오는 촉매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폭력 행사와 함께 부상자가 발생하고 경찰까지 출동하자 사건의 성격은 달라졌다. 물리적 접촉 없이 말싸움에만 그쳤다면 부상 사진과 함께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글이 올라오는 일도, 청원인이 단시간에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역 사건은 폭력으로 번짐으로써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랐고 언론매체와 인터넷, SNS를 통해 급속도로 확산됐다. 사건 관련자들의 추가 폭로가 이어지며 반전을 거듭하다 남혐과 여혐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떠올랐다. 이제는 사건 당사자들보다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형성된 남혐과 여혐 집단의 행태에 더 많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남혐이든 여혐이든 이들의 커뮤니티에는 정의의 분노가 넘친다. 하지만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은 엉뚱한 곳이다. 여혐 사이트엔 여성들에 대한 조롱과 모욕, 폭력의 글과 이미지가 넘쳐난다. 그들이 싫어하는 페미니스트 여성들인 ‘메갈’이나 ‘워마드’만 겨냥한 게 아니다. 여성 전체, 여성의 존재 자체를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남혐 사이트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남성 일반을 공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남성과 연애하는 여성까지 싸잡아 비난하고 공격한다. 이것도 정의라고 주장한다면 어디까지나 ‘그들만의 정의’다. 정의의 분노가 아닌 분노를 위한 분노일 뿐이다.

이들의 편협한 분노, 일차원적 혐오의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그들만의 혐오에 그치지 않고 확대 재생산돼 위험수위에 다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일각에선 빈부격차의 확대나 청년실업 같은 사회구조적 문제에서 원인을 찾는다. 게임 영화 방송 인터넷 등을 통해 자극적이고 폭력적인 콘텐츠에 많이 노출됨으로써 정서적으로 황폐해진 게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입시경쟁 위주의 교육 현실, 소통과 이해가 부재한 사회 현실에 책임을 돌리는 이도 있다. 이들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간과해선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중재하고 소통을 주선하는 중재자가 실종됐다는 점이다. 제대로 기능만 한다면 정치가 해야 할 일이지만 한국정치의 현실을 볼 때 기대난망이다. 사회원로나 시민단체들도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우려 섞인 성명서를 내는 것뿐이다. 갈등의 한 당사자로 의심받는 기업이나 관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

교회는 다르다. 목회자는 강단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사랑과 화해, 용서의 메시지를 전한다. 성도들은 삶 속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려 애를 쓴다. 세상적 가치를 추종하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살려는 청년들도 적지 않다.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남혐과 여혐의 어느 일방에 가담하지도, 방관자로 머무르지도 않을 것이다. 대신 중재자, 화해자로서 생명과 정의, 평화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지금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역할이다. 99년 전 3·1운동을 주도했던 한국교회의 정신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송세영 종교부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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