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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천지우] 여기는 평양, 안심하고 내려라



옛날 신문기사는 기막힌 이야기의 화수분이다. 1976년 이스라엘의 엔테베 작전보다도 6년 전에, 엔테베 작전 저리 가라 할 만한 블록버스터급 하이재킹(공중납치) 사건이 일본과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요도호 사건이다. 이게 왜 아직까지 영화화가 안 됐는지 궁금하다. 총격전이나 폭파 장면이 없어서였을까.

‘대한국민 현대사’(고경태 지음, 2013)에 실린 1970년 4월 1일자 한국일보 기사를 보면 큰제목이 ‘피랍 JAL기 김포공항에 착륙’, 소제목은 ‘여기는 평양, 안심하고 내려라’로 돼 있다. 도쿄에서 후쿠오카로 가던 JAL기 요도호를 납치한 일본 적군파(극좌 테러단체) 요원 9명은 기장에게 평양으로 가라고 했다. 기장은 주유해야 한다며 후쿠오카를 들른 뒤 평양으로 가는 척하다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기사는 이때의 이야기다.

당국은 승객 구출을 위해 김포공항을 평양공항으로 위장했다. 공수부대원들이 인민군 차림을 하고 요도호에 접근해 “평양이다. 환영한다. 모두 내리라”고 했다. 하지만 긴가민가했던 납치범들은 “비행기가 왜 이렇게 많으냐. 평양 같지 않다. 김일성 초상화는 왜 없느냐”고 물었다. 공수부대원은 “우리도 많이 발전했다. 국제선이 많이 날아온다”고 답했지만 납치범들은 의심을 풀지 않았다. JAL 김포사무소 직원이 가서 “나는 아사히신문 평양특파원인데 수고가 많다”며 내릴 것을 권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때 번호판을 지운 낡은 지프와 버스 여러 대가 급조한 북한 깃발을 흔들며 요도호 주위를 돌았다. 이곳이 평양임을 증명하려는 애처로운 연기였다. 결국 속지 않고 협상을 벌인 납치범들은 김포공항에서 탑승객 전원을 풀어주는 대신 일본 운수성 차관을 인질로 잡고 평양으로 떠났다. ‘세계혁명의 전진기지’를 만들겠다던 납치범들은 북한에 망명했다.

착륙한 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분간 못하는 납치범도, 그들을 속이려고 어설프게 쇼를 벌이는 당국의 모습도 어이가 없어서 쓴웃음이 나온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러 한반도 주변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일본에서 하이재킹을 하며 북한에 가려는 극좌파 무장단체가 다시 나올 리도, 한국의 공항에서 저렇게 기이한 소동이 재연될 가능성도 없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북한과의 국교 정상화를 목표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정상회담하자고 줄기차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삐걱거린 비핵화 협상을 되살리려고 필사적으로 북·미 양측을 어르고 달래는 중이다. 정부는 또 김 위원장의 연내 서울 답방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김 위원장에게 “여기는 서울, 안심하고 내려라”고 말하고 싶을 거다. 그런데 이 와중에 일본 적군파 못지않게 어이없는 조직이 나타났다. 국내 좌파 성향 단체들이 김 위원장을 열렬히 환영하자며 구성한 백두칭송위원회다.

우리가 김 위원장의 방남을 환영할 수는 있다. 환영하는 게 좋다. 하지만 백두를 칭송하다니, 이름이 참 고약하다. 칭송의 대상은 당연히 산(山)이 아니라, 김일성 직계 가족을 신격화하는 북한 용어인 백두혈통일 게다.

연초에 남북 화해 무드가 시작됐을 즈음 꽤 유명한 진보 진영 인사가 김정은 일가에 진심으로 감동하면서 SNS에 찬사를 늘어놓는 것을 보고 놀랐었다. 이 땅의 평화라는 절박한 대의를 위해 저 왕가(王家)의 크나큰 흠결을 잠시 눈감아주자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 감동과 애정이 도대체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생각해보니 답은 간단했다. 김일성 때부터 깊이 뿌리내렸던 애정이 암흑을 뚫고 양지로 올라온 것이다. 이제 종북(從北)을 숨길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된 거다. “문재인은 빨갱이”라며 탄핵에 사형까지 부르짖는 극우 단체나 백두칭송 무리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 양 극단에 있는 둘 다 사회에 해롭고 통일을 저해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백두혈통을 떠받들면서 남북 화해와 통일을 추진할 수는 없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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