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전정희] 놀라운 지자체, 부끄러운 교계



광주광역시 양림동 일대를 ‘양림역사문화마을’이라고 부른다. 서울로 치자면 인사동과 비슷한데 그 콘텐츠의 다양성을 보자면 양림동이 훨씬 빼어나다. 양림동은 근대 역사문화공간으로서 기독교 유적 보존과 스토리텔링으로 발길을 붙잡아 두는 매력이 있다. ‘관광해설사와 함께하는 양림역사문화탐방’ 예약은 이달 말까지 마감된 지 오래다. 선교사 사택을 활용한 게스트 하우스들도 대개 12월 말까지 예약이 꽉 찼다. 양림동이 수도권이었으면 젠트리피케이션화되었을 것이다.

양림동 면적은 0.68㎢로 여의도의 5분의 1 정도다. 양림동은 조선시대 호남 중심 도시 나주부 외곽의 한적한 마을에 불과했다. 그런데 호남은 양림동이 ‘뜨기’ 시작하면서 그 지형도가 바뀌게 된다.

조선 말. 호남평야와 나주평야 수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 자본이 각기 군산과 목포 개항을 강요한다. 1900년 전후 레이놀즈 선교사를 비롯한 미 남장로교 해외선교회 소속 7인의 선발대가 호남 선교를 목적으로 답사여행을 함으로써 호남복음화가 진행됐다. 이들은 군산 전주 나주 목포 순천 등에 선교부를 추진했다. 한데 전주와 함께 내륙 중심인 나주가 유림의 극렬 반대로 선교부는커녕 선교사 목숨이 위험해지는 상황에 처했다.

선교사들은 할 수 없이 영산강 뱃길을 이용해 더 깊이 들어갔고 그렇게 자리 잡은 곳이 양림동 양림산 자락이다. 이 양림산은 영산강 지류 광주천이 내려다보이는 해발 108m의 낮은 동산으로 어린아이 시신을 매달아 두는 풍장터였다. 당시 아이가 천연두 등에 걸려 죽으면 성문 밖이나 풍장터에 매달아 두었는데 이는 악귀가 실수로 또 다른 아이를 데려가지 못하도록 하는 징표물이었다. 서울 수구문 밖 천연두에 걸린 한 소녀가 거의 죽은 채 방치돼 있었고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이를 거두었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 조선은 무지에서 깨어 나오지 못하던 때였다.

선교사들은 양림동 선교타운 건설이 광주천 범람, 적은 인구, 치안 불안전 등으로 악조건이란 걸 알았으나 내륙 선교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1904년을 전후로 유진 벨 선교사 등이 중심이 되어 학교 병원 등을 세워 나갔다. 건축 자재는 목포에서 영산포까지 해로로, 영산포에서는 육로로 날랐다. 그리고 이해 12월 25일 양림리교회 설립 예배를 올린다.

유진 벨은 이 무렵 1만장의 전도지와 달력, 신약 100권과 찬송가 150권을 팔았다고 기록했다. 1905년 유진 벨과 의료선교사 오웬의 살림이 미국에서 도착했다. 이 짐은 광주 관찰부의 검사를 거쳐 양림리 사택으로 운반됐다. 광주읍성 사람들은 성 밖에서 벌어지는 이 진기한 문화충격에 연일 구경꾼이 됐다.

유진 벨은 “크리스마스 날 오전 11시 밖을 보았더니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긴 줄을 서서 우리 집을 향해 몰려왔다…. 여인들은 한쪽 방에, 남자들은 다른 쪽 방에 초청했다….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니다. 며칠 전 이 집으로 많은 상자와 짐이 운반되는 것을 보았으며 이 이상스러운 외국인이 무엇을 가져왔는가를 보는 것이 첫 번째였다”(‘선교보고’ 중)라고 기록했다.

그 양림동은 지금, 마치 영화세트장을 보는 것처럼 근대기독교문화거리가 됐다. 호남신대 양림교회 선교사묘역 선교사사택 수피아여중고 광주기독병원 기독간호대 어비슨농업학교터 조아라기념관 숭일학교터 이일학교터 오웬기념각 정율성생가 3·1만세운동태동지 유진벨기념관 등이 자리한 모든 골목길에는 한국기독교역사가 흐른다. 사실상 양림동기독교문화마을인 셈이다.

양림동 광주선교부는 당시 윤웅열 광주관찰사가 열린 시각으로 신문물을 받아들였기에 설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100여년이 지난 후 가난한 양림동은 재개발되지 않았던 탓에 옛 건물들이 살아남았다. 광주시장 등 호남의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이런 선교유적지를 관광콘텐츠화했다. 광주 순천 목포 신안 등의 기독교문화 유적 보존은 한국교계의 힘이라기보다 지자체의 재생 사업 결과다. 지자체장마다 기독교콘텐츠를 더는 특정 종교가 아닌 한국의 문화유산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교계 단체는 지자체가 지리산선교유적 등을 개발하려 해도 운영주도권을 잡기 위해 이전투구하는 양상에서 볼 수 있듯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게 한다. 씁쓸한 현실이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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