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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김의구] 아버지의 ‘야식 셔틀’



아마 40여 년 전 어느 늦봄이었던 것 같다. 동해안으로 당일치기 직장 야유회를 떠났던 아버지께서 늦은 귀갓길에 비닐봉지 하나를 들고 오셨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남매들 앞엔 난생 처음 보는 음식이 놓여 있었다. 짭조름한 바닷물에 잠긴 감색 물체를 입에 넣자 석유처럼 강한 바다냄새가 퍼졌다. 눈살을 찌푸리며 집어든 두 번째 시커먼 음식은 빠드득 씹히는 식감과 초장의 신맛 외에 별다른 맛은 없다고 할 만큼 밋밋했다.

내륙 음식에 익숙한 어린 입에 경북 강구에서 가져온 멍게와 해삼의 첫맛은 실망스러웠다. 오래 씹으면 단맛이 돌고 석유 향이 실상은 상큼함이었다는 사실은 장성하며 몇 차례나 더 해산물을 접하고서야 알았다. 평소 엄격한 편이던 아버지가 회를 싸들고 오신 마음을 헤아려 보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흐른 뒤였다.

짜장면을 처음 먹어본 게 언제였는지 가물거린다. 하지만 탕수육에 대한 첫 기억은 생생하다. 멍게 때와 비슷한 즈음 거나하게 취기가 오르신 아버지의 손에 누런 튀김이 들려 있었다. 회식자리에 남은 게 아까워 싸들고 오셨다는 소스 없는 탕수육이었다. 이미 저녁식사를 마친 뒤였고 튀김도 눅눅했지만 고소한 육향과 씹는 맛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당신께선 몇 달 후 어느 월급날, 회식을 끝내고 귀가하시면서 인근 중국집에 들러 진짜배기 배달을 시키셨다. 달콤한 소스까지 더해진 탕수육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문화 충격이라 부를 만했다.

아버지표 야식이 잦은 일은 아니었다. 사계절 행사라 할 빈도였고, 아예 한 차례도 없이 지나는 해도 많았다. 당시는 집에 전화도 없던 시절이라 배달 문화가 발달해 있지 않았다. 외식 값도 비싸 삼시세끼를 전적으로 어머니의 손에 의존하던 때였다. 아버지께서 이따금씩 들고 오시는 별미는 뇌리를 파고들어 평생의 입맛이 됐다. 비슷한 먹거리를 대할 때면 세월을 쏜살같이 거슬러 올라 당시의 입맛이 되살아나곤 했다. 내 인생의 멍게이자 탕수육인 셈이다.

취기 오른 눈길로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표정도 기억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를수록 더 생생해지는 듯하다. 하지만 아버지의 돌출적(?) 모습들을 곰곰이 되씹어 보게 된 것은 아버지의 당시 연세를 훌쩍 넘긴 뒤였다. 주말에 집을 비운 데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혼자 맛난 것을 드신다는 죄책감이 드신 걸까? 아니면 그저 남은 음식이 아까워서였을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술잔을 기울이는 아버지 뇌리 한편에 가족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랬으니 취하신 중에도 가족의 야식거리를 이따금씩이나마 챙기셨을 터다. 선공후사(先公後私), 가정보다 직장에 더 무게를 둔 삶을 살던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의식 깊은 곳에는 가족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에선 망실이 존재를 인식시킨다고 한다. 망치가 필요한데 없을 때 그 기능과 존재를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 존재는 죽음 앞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망실과 사멸뿐 아니라 예기치 못한 행동을 통해서도 존재가 체험된다. 야식을 챙기는 의외의 행보는 따뜻한 속정, 가족에 대한 헌신의 각오같이 평소 잊고 지내던 아버지의 속내를 깨닫게 만든다. 인식에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무의식에 남아 가족 사이 유대를 다지는 든든한 토대가 된다.

오늘 회식 자리가 예정된 아버지, 어머니라면 한두 잔을 내려놓고 한 번쯤 식당에 추가 주문을 넣으라고 권하고 싶다. 집을 향하다 걸음을 멈추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좋아할 야식을 챙겨보면 어떻겠는가. 생일이나 졸업 같은 ‘무슨 날’이 아니라 평범한 어느 날이면 더 좋을 것이다. 내일이나 한 주, 한 달 뒤라도 괜찮다. 더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가는 지금의 부모들이라면 한 해 한 번이라도 상관없을 것이다.

전화 한 통, 클릭 몇 번으로 온갖 음식이 배달되지만 아버지의 자발적인 ‘야식 셔틀’은 여전히 귀한 세상이다. 불시에 받아든 야식은 아이들에게 평생의 좋은 기억으로 남아 인생의 신산을 견디는 힘이 될 것이다. 그런 기억이 대물림되고 사회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면 가족의 의미를 수호하는 굳건한 가치관의 일부가 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아버지와 어머니의 속정을 아이들이 기대하고 있다. 사랑은 보고 싶어 갈망하는 게 아니라 필요로 할 때 기꺼이 함께 있어주는 것이다.

김의구 제작국장 겸 논설위원 e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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