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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준 칼럼] 무마는 소통이 아니다



원로 대화·KBS대담은 실컷 듣고 결국 내 갈 길 가겠다는 것
대통령의 인식에서 위기의식을 찾을 수 없는 게 진짜 위기
난국 헤쳐나간 지도자의 소통에는 현실 직시·고통분담 요구·
정치적 반대 경청 있어… 리더 혼자 아닌 협력으로 위기 극복


옥스퍼드대의 아치 브라운 교수는 혁신적 리더의 유형으로 재정의형(redefining) 리더와 변혁적(transformative) 리더를 꼽는다. 재정의형 리더는 침체에 빠진 국가를 살리기 위해 국정을 다시 설계하는 유형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나 마거릿 대처, 로널드 레이건 등이 꼽힌다. 변혁적 리더는 체제의 지각 변동을 가져오는 리더로 덩샤오핑이나 미하엘 고르바초프, 넬슨 만델라 등을 꼽는다. 대부분의 리더가 이런 리더십을 꿈꾸지만 성공 족보에 들기는 참 어렵다.

혁신에 성공하는 리더는 암환자를 치유하는 명의와 같다. 암인지를 정확히 진단해야 하고, 수술 등 처방이 적중해야 하고, 처치를 빈틈없이 해야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있다. 환자와의 소통이다. 환자가 의사를 신뢰하면서 완치 의지를 갖게 만들어야 한다. 결국 병을 이겨내는 것은 환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국가지도자도 정확한 진단, 탁월한 처방, 빼어난 처치와 국민의 에너지를 모으는 소통이 성공의 비결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꿈도 재정의형 또는 변혁적 리더로 성공하는 것이리라. 대한민국의 기존 질서를 바꾸려는 의지로 충만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과녁을 향해 쏘는 화살들에서 ‘적중이요!’ 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는다. 비핵화든 외교든 소득주도성장이든 탈원전이든 궤도를 이탈하지 않은 것이 별로 없다. 염증을 암으로, 암을 염증으로 진단하니 처방이 틀릴 수밖에 없고, 엉뚱한 처치가 줄을 잇는다. 여기다 더 심각한 것은 왜곡된 소통이다. 소통방식 가운데 가장 고약한 것이 남의 얘기를 실컷 듣고 결국은 ‘마이 웨이’를 주창하는 것이다. 원로와의 대화나 KBS 대담은 이를 확인하는 자리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집권 1기 시절에 총 337회, 2기 시절에 총 374회에 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의 귀는 열려 있었고, 그의 국정은 독선이 없었다. 루스벨트는 이 시기에 이룬 미국의 진보가 “공동의 힘으로 이룬 업적”이었다고 회고한다.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 소련의 스푸트니크 인공위성 발사는 미국에 큰 충격이었다. 미국이 2등 국가로 전락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져 온 미국이 들썩였다. 아이젠하워는 국민에게 걱정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걱정하라고 얘기했다. 과장된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이 과학기술에서 미국을 추월했고 안보를 위협하는 중대한 사태라고 선언했다. 이에 대응하는 것을 우선적 국가 과제로 삼아 온 미국이 움직였다. 10년 만에 미국이 달을 먼저 밟았고 이후 양국의 과학기술 격차는 확대되었다.

국제협력주의자였던 케네디는 냉전을 해소하고 싶었다. 쿠바 미사일 위기가 닥쳤을 때 그의 입장은 당연히 대화로 해결해 보자는 쪽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의견을 들었고, 서로 다른 의견을 내는 참모들과 충분히 토론했다. 그리고 그의 입장과 달리 현실주의적 결정, 즉 전쟁을 무릅쓰는 단호한 결정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영웅이 되었다.

국가적 어려움을 헤쳐나간 리더들의 소통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 현실을 직시하고 위기 징후에 대해 호들갑이라 할 정도로 부산스럽게 대응한다. 둘째, 국민에게 경각심을 고취하고 고통 분담을 과감히 요구한다. 셋째, 전략적 의사 결정에 정치적 반대자의 의견도 경청하고 때로 그 의견을 과감히 채택한다. 위기는 지도자 혼자 극복하는 것이 아니고 협력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이들은 모두 강조한다.

이와는 달리 문 대통령의 소통은 무마와 봉합에 방점이 찍힌다. 춤추듯 움직여 목표를 맞추는 북한의 신형 탄도미사일은 유엔 제재와 9·19 군사합의 위반이고 미사일 방어체계에 큰 구멍을 내는 것인데도 무마하기 바쁘다. 이러니 군마저 나약한 모습으로 전전긍긍한다. 한없는 아량을 베푼다고 북한이 감읍할까. 오히려 조롱만 돌아오고 있다. 지금은 북한에 단호하게 경고하고, 안보 경각심을 일깨워야 할 때 아닌가. 그래야 협상도 궤도 이탈을 방지할 수 있지 않을까.

경제도 그렇다. 1분기에 미국이 3.2% 성장하는 판에 1.8%(전기 대비 -0.3%) 성장을 했으면 위기의식을 보이고 비상한 각오를 밝히면서 함께 어려움을 극복하자고 호소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대통령의 메시지는 “경제, 잘 가고 있어요!” “장관들 일 잘하고 있잖아요!”로 돌아온다.

국민의 불안감에 진정제를 놓으려는 소통으로는 변화의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 차라리 엄살을 떠는 것이 태평스러운 것보다는 낫다. 1997년 외환위기 전 정부는 한국경제의 펀더멘털이 튼튼하다고 강변했지만 외환위기를 막지는 못했다. 반면에 한국이 도약할 때마다 강한 위기의식이 큰 역할을 했고,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도 온 국민이 위기의식으로 뭉쳐 극복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인식에서 위기의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진짜 위기라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전 국회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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