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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에서-천지우] 강철비 내리는 벙커에서



회사에 걸려오는 독자 전화 중에는 ‘북한 김정은이 얘기가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맨날 대문짝만하게 쓰냐’는 불만 제기가 있다. 김정은 체제에 대한 혐오나 그 정권과의 대화에 매달리는 문재인정부에 대한 반감을 표출하는 전화다. 딱히 응대할 말도 없어서 잘 알겠다고 하고 끊지만, 나도 김정은 소식이 많은 지면을 장식하는 현실이 이들 독자와는 다른 이유에서 불만스럽다. 누적되는 피로가 사안에 대한 관심과 의욕을 떨어뜨린다고 할 수 있겠다. 도발과 제재, 협상과 평화 무드, 그러다 교착에 이은 도발이 무한 루프처럼 반복되다보니 각 상황을 바라보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간다. 희망을 갖고 달려드는 것이 그저 헛돼 보이는 무념의 상태로 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남북 관계, 한반도 문제를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서 북한을 소재로 한 영화와 소설을 찾아봤다. 당대를 살아가는 대중의 인식이 예민하게 반영돼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다.

영화는 2017년 12월 개봉된 ‘강철비’와 지난해 말에 나온 ‘PMC: 더 벙커’(이하 PMC)다. 둘 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목숨이 위태로워진 상황을 다룬다. 미사일도 나온다. 당연히 절체절명의 한반도 위기 상황이 펼쳐진다. ‘강철비’는 청와대 직원과 북한 공작원이, ‘PMC’는 글로벌 PMC(민간군사기업)의 한국계 용병과 북한 의사가 주인공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주체가 강철비에서는 한국 정부이지만, PMC에선 한국 정부가 아니다. 두 영화는 주변 강대국들을 믿지 않는다. 다들 자국의 이익만 따지기 때문이다. 특히 ‘PMC’에서 미국은 모든 상황을 꾸미고, 파국으로 몰아넣고, 야비하게 이용하는 ‘악의 제국’이다. ‘강철비’는 ‘PMC’만큼 반미 성향이 도드라지지는 않지만, 극 중반까지 막강하던 미국의 입김이 후반부에 들어선 갑자기 사라지고 남북이 문제 해결의 주체로 우뚝 선다. 미국에 기대지 않고 당사자끼리 해결하고 싶다는 강력한 희망이 들어간 결말이다.

두 영화가 믿는 것은 남북의 형제애다. 북한 지도부는 신뢰할 수 없어도 인간미 넘치는 북의 개인은 믿을 수 있다고 호소한다. ‘PMC’에서 한국계 용병 주인공이 극적인 국면에서 던지는 “고맙다, 북한”이란 대사가 대표적이다. 북한 의사가 죽지 않아서 고맙다는 뜻이지만, 말 그대로 북한이란 존재가 고맙다는 의미로도 들린다. 어수선한 ‘PMC’보다 흡인력이 있는 ‘강철비’는 무엇보다 관객에게 서늘함을 주는 게 미덕이다. 한반도는 무사태평한 곳이 절대 아니고 언제든 저런 난리가 눈앞에서 벌어질 수 있다는 서늘한 두려움을 안겨 준다. 가와노 가쓰토시 전 일본 통합막료장(자위대 수장)은 17일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 재임 중 가장 긴박했던 시기로 2017년을 꼽았다.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거듭하고 북·미 정상이 말 폭탄을 주고받던 때다. “(이전과는) 다른 단계에 와 있다”고 판단한 가와노는 미 합참의장, 태평양군 사령관과 준비태세 정보를 교환하면서 “자위대가 어떻게 움직일지 머리로 체조를 했다”고 한다. 군사 대응 시뮬레이션을 해봤을 정도로 사태가 심각했다는 얘기다. 요행히 넘겼던 그 위기를 당시에 내가 정말 위기로 인식했었는지 스스로 반성해본다.

윤고은의 새 단편소설 ‘부루마불에 평양이 있다면’에는 절박한 위기의식 대신 색다른 현실 인식이 있다. 오래 사귄 연인이 있지만 형편상 결혼이 주저되는 남자주인공은 남측 건설사가 짓는 개성 신도시 아파트 분양 소식을 우연히 접한다. 그가 모델하우스에 가서 ‘통일도 안 됐는데 이런 게 가능하냐’고 묻자 상담원은 이렇게 답한다. “통일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르죠. 저희가 약속드릴 수 있는 건 통일이 얼른 오지 않더라도 집값은 무조건 뛴다는 거예요. 고객님이 입주하실 수는 없지만 투자를 하실 수 있어요. 투자는 통일과 관계없이 가능하죠.” 개성 신도시를 놓친 주인공 커플이 평양 근교 2차 분양에 당첨되면서 소설은 끝난다. 서울·수도권에 자리 잡기 힘든 이들에게 북한이 대박 부동산 투자처로 떠오른다는 이야기는 시쳇말로 신박(새롭고 놀라움)하면서 씁쓸하기도 하다.

천지우 정치부 차장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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