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가리사니-이도경] 기자 아빠의 불량한 상상



사랑스러운 아들을 위해 대입 스펙을 만들어 볼까. 기자로 활동 중이니 언론 관련 학과가 수월할 듯하다. 아이 꿈은 상관없다. 어차피 티라노사우르스→퇴마사→경찰→법원 사람들→작가→유튜버 등으로 장래 희망을 바꿔온 녀석이다. 머리가 조금 굵어질 때 “학문의 경계가 점점 무의미해지는 시대다. 대학 가면 간섭 않겠다”는 설득이 먹힐 것이다. 대학 간판의 효용성을 모르지 않는 아내도 거부 못할 것이다.

직업윤리를 내려놓는 뻔뻔함이 첫 준비물이다. ‘한 달 벌어 한 달 사는 주제에 다른 애들은 부모가 업고 뛰는데 알량한 직업윤리로 아이를 뒤처지게 한 건가.’ 취재하며 숱하게 접한 ‘있는 집 자녀’들의 반칙들로 정당화하며 뻔뻔함을 단단히 붙들어 놓는다. 인맥 관리가 다음이다. 기자 생활 13년 중 절반 이상 교육 영역을 담당했다. 도움을 줄 만한 언론계와 교육계, 입시업계 얼굴들이 떠오른다. 부족하면 이따금씩 그들 입맛에 맞는 기사를 생산하고 취재 핑계로 술잔도 기울이며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기존 관계는 공고히 한다. 고교 진학까지 7년 남았으니 시간은 있다.

얼개를 그렸으니 이제 디테일이다. 대세로 자리 잡은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을 노린다. 스카이로 불리는 최상위권은 바라지 않겠다. 아이를 너무 닦달하고 싶지는 않다. 남들이 고개를 끄덕여줄 정도의 학교라면 만족하려 한다.

학종 평가의 뼈대는 학업역량 전공적합성 발전가능성 인성이다. 학업역량은 주로 내신이다. 전공에 대한 학업역량을 평가받을 것이니 힘을 줄 과목과 힘을 뺄 과목을 선별해 효율적으로 점수를 딴다. 스펙은 전공적합성과 발전가능성에 초점을 맞춘다. 아이에게 언론 동아리를 만들도록 한다. 회사에는 고교생 인턴 기자를 시범적으로 운영해 보자고 제안한다. ‘꿈나무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이를 통해 사회 공헌도 한다’ 따위의 명분을 붙인다. 간부급 기자(7년 뒤)의 ‘아름다운’ 제안은 먹힐 수 있다. ‘시범’이므로 아들 스펙 쌓은 뒤 없어져도 상관없다.

뒷말 안 나오도록 다른 학교 동아리들도 섞어 후배 기자들과 현장에 보낸다. 기사 작성자인 내 이름 뒤에 아들 이름을 떡하니 붙이는 바보짓은 않는다. 꺼림칙하면 다른 언론사에서 일하는 수험생 학부모와 품앗이도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일에 치여 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아이 입시에 신경 쓸 헛똑똑이가 주변에 널렸다. 교수 연구에 파트타임으로 참여시키는 옵션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폼 나는 봉사활동도 주선 가능할 것이다. 모든 과정은 입시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의 조언으로 진행한다. 입시 전문가가 찍어주면 아버지는 인맥을 푼다. 잘 따라와만 준다면 아들은 입학사정관들이 입을 떡 벌릴 고교 스토리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게 자신의 것이든 아니든.

휴가 기간이었던 지난 13일 아홉 살짜리 아들과 놀아주면서 해본 상상이다. 이날 교육부가 ‘교수자녀 논문 끼워 넣기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본보 특종으로 촉발된 정부 조사가 1년 넘게 진행됐고 그 중간 결과이다. 이런 불량한 상상에 영감을 불어넣어 준 대학 교수는 87명이었다. 서울대 포항공대 같은 손꼽히는 명문대, 경북대 부산대 전남대 같은 거점국립대에 몸담은 분들이다. 중간발표이므로 연루 대학과 교수는 늘어날 것이다. 다수가 국민 세금으로 지원된 연구에서 자녀 스펙을 만들었으니 상상 이상의 사람들이다.

축구 경기면 바로 레드카드 받을 악질 반칙이다. 평범한 누군가의 자녀에게서 기회를 가로챘을 수도 있고, 더 적합한 인재가 발굴되지 못하는 해악을 끼쳤을 수도 있다. 가만히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반칙을 부추긴 점이 개인적으론 가장 못마땅하다. 반칙으로 분노가 들끓어도 교수 개인의 일탈쯤으로 무시하고 ‘학생에게 등록금 더 걷게 해 달라’ ‘세금 더 거둬 나눠 달라’ ‘대학 일에 상관 말라’며 목소리 높이는 대학과 교수 사회도 뻔뻔하긴 마찬가지다.

교육부가 좀 도와 달라. 연루 교수들을 꼭 학계에서 퇴출시켜 달라. 부당 이득을 본 자녀들도 입학을 취소해 달라. 이런 교수들을 방치한 대학·학과에는 제도를 고쳐 세금을 지원하지 않도록 해 달라. 영감을 준 자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지 않고는 스스로 상상을 멈출 자신이 없다. 자녀 사랑을 먹고 자랄 ‘반칙의 유혹’은 혐오스럽지만 맹렬할 것이므로.

이도경 사회부 차장 yido@kmib.co.kr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