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오피니언  >  칼럼  >  기타

[청사초롱-최연하] 과거가 온다



삶의 시간이 누적될수록 과거가 쏜살같이 온다. 살아갈 날보다 산 날이 많아서가 아니라, 과거 속에 귀한 에너지가 내장돼 있음을 나중에야 알았기 때문이다. 과거는 폐기돼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살아 있고, 다가올 시간보다 더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였다.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답이 그 안에 있었기에 과거의 시간대와 접속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과거·현재·미래로 나뉜 세 개의 시간대는 다툼 없이 흘러갈 것이다. 누군가의 편의에 의해 나뉜 세 개의 시간은 사실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는 해체하면 그만이지만 너무도 강력하게 굳어져서 좀체 부술 수가 없다. 특히 자본, 분단, 역사, 시간…. 이데올로기는 언제부턴가 한반도를 작동하는 시스템이 됐기에 이 프레임을 와해시키기란 요원한 일이다. 4, 5월을 지나 6월을 보내며, 우리의 근현대사를 기억하는 달력의 숫자들을 헤아리다 새삼 월터 벤야민(1892~1940)을 다시 읽게 된다.

벤야민의 텍스트에 여러 형태로 변주되며 자주 등장하는 ‘꼽추 난쟁이’ 이야기다. 난쟁이인데다 꼽추라니, 벤야민은 무엇을 비유하고 싶었던 것일까. 작고 흉측해서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꼽추 난쟁이는 우리가 잊고 있었던 과거의 한순간으로, 쓸모가 없어서 폐기한 물건으로, 무심코 지나친 사람으로, 역사로, 신학으로… 비유된다. 너무 작아서 일반의 눈높이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보더라도 못생긴 얼굴에 그저 눈을 감게 되는 꼽추 난쟁이. 그런데 이 꼽추 난쟁이가 결정적인 순간 ‘호랑이처럼 도약’해 우리를 도울 때가 있다. 우리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맞추고 그의 손을 마주 잡을 때이다. 그리고 꼽추 난쟁이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선형적이고 현대적인 시간관을 해체하는 순간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조력자 꼽추 난쟁이는 죽었다고 생각하는 과거 혹은 역사에 다름 아니었다. 과거를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살아날 수 없고, 우리를 구원할 수 없는 꼽추 난쟁이 일화는 미래에 방점을 두고 계속 전진하기에 바쁜 현대인들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최근 몇 년 새 대중매체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말 중 ‘응답하라’ ‘기억하라’라는 말은 벤야민의 구호에 다름 아니다. 과거가 현재를 호출하면 우리는 거기에 응답해야 하고, 과거를 살려내려면 기억의 화학작용이 필수라는 것이다.

벤야민의 시간관은 과거를 살려내 현재를 더욱 생생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현재를 살아간다는 것은 과거 속에 숨어 있는 은밀한 인덱스를 깨워내는 일이고, 과거 세대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약속’이 있다고 말한다. 벤야민에게 ‘전통’이란, 과거의 요청에 현재의 우리가 응답하면서 형성되는 것이고, 당연히 과거는 현재의 우리가 응답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름 아닌 상속권의 문제와도 연결되는데, 예를 들면 진정한 역사가라면 한 시대의 사건사고를 하나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기록해서 다음 세대에게 전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4·3, 4·16, 5·18, 6·25… 모두 낱낱의 기록들을 누구도 박탈할 수 없게 기억의 창고에 수집·보관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그 역사의 기록들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상속권을 가진, 대한민국은 바로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자도 안전하게 잠들 수 있고, 우리가 오래전부터 꾸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소망들도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다.

하지만 “과거의 진정한 이미지는 휙! 지나간다. 과거는 인식 가능한 순간에 인식되지 않으면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섬광 같은 이미지”이기에 우리가 적극적으로 기억하지 않고 역사의 인덱스를 읽지 않는다면 과거는 단지 죽은 사물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스스로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가 스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귀를 기울여 듣는 목소리들 속에는 이제는 침묵해버린 목소리들의 메아리가 울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라고 벤야민이 말한다.

최연하(사진평론가)
 
트위터 페이스북 구글플러스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