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전정희] 해 아래 학대 그리고 정치목사



# 1760년대 유럽에서 야곱 구예라는 평범한 농민이 갑작스레 스타가 됐다. ‘클라인조그’, 즉 ‘선한 조그’라는 별명으로 유명했다. 사회개혁가 히르첼이 이 촌부를 발굴했는데 야곱은 질박한 입담으로 계몽 귀족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히르첼은 그를 ‘농촌의 소크라테스’라는 개념으로 순회 전도자로 만들었다. 루소와 괴테가 열광했을 정도다. 괴테는 야곱이 스위스 시골로 순회 전도에 나서면 ‘성지순례’라며 따라나서기도 했다.

야곱은 농민들에게 말했다. “우리 각자가 본분에 충실히 하는 것이 피차에 선을 행하는 길입니다. 귀족이 할 일은 우리 농민에게 할 일을 명령하는 것입니다. 국가를 위한 최선이 무엇인지 고민할 시간은 귀족에게 있으니까요. 따라서 우리는 그들의 결정에 복종하고 근면과 충성으로 보답하면 됩니다.” 자연의 섭리와 신의 뜻에 따라 명령 내린 사람들에게 복종하고 최선을 다한다면 선이 이뤄지고 지상 천국이 이뤄진다는 야곱의 얘기에 귀족이 반하지 않을 리 없다.

# 1871년 프랑스 극좌파 자치정부 파리코뮌의 혁명재판소가 성직자 검거에 나서 한 예수회 사제를 체포했다. 국가검사 라울 리고라는 이가 사제를 심문했다. “당신의 직업은?” “하나님의 종입니다.” “당신의 주인은 어디 사는가?” “모든 곳에.” 그러자 리고가 심문을 멈추고 갑자기 법정 서기에게 말한다. “받아 적으시오. 상기인은 자신을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부랑자 종으로 지칭함.”

# 1907년 대한제국. 정미7조약의 체결로 전국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다.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했으나 모든 권한이 일본 통감부에 넘어갔다. 순종이 민심을 달래는 선유사를 임명했는데 그중 충청도 선유사로 임명된 사람이 근대계몽운동가 최병헌 목사였다. 애초 한학자였으나 “서양 기술만이 아니라 복음(道)도 받아들여야 축복받은 나라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한 우리나라 첫 신학자이기도 했다.

선유사가 된 그는 “인애지심과 자비지성으로 (교인과) 동포의 사망을 구하고자 한다”며 1~2개월의 짧은 기간 동안 임무를 수행했다. “(비록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하라”(롬 13:1)는 말씀을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장을 돌아본 그는 백성의 도탄 근원이 일본이라는 악의 뿌리에 있음을 알고 선유사직을 버린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과 기독교청년운동 등 기독교민족계몽운동에 힘쓴다.

세 사례는 종교와 정치의 역학 관계를 보여준다. 어느 경우든, 종교가 지향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개입했던 ‘선’이라는 목적에 다다른 예는 없다. 스스로 권력자가 되거나 권력에 이용당하는 변종 ‘세상 권력’이었을 뿐이다.

사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야곱 구예와 같은 사람들이다. 진심으로 주를 사모하고 그 사모 가운데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이들이다. 이 순전한 믿음의 무리는 마치 양과 같아 양치기가 이끄는 데로 향한다. 농민 야곱이 “자신의 본분에 따라 피차의 선을 행하자”라는 신앙 고백이 종교권력가 입맛에 맞는 꼭두각시 짓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라울 리고의 혁명재판소는 숱한 사제를 처형했다. 그 가운데는 부랑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의 진실한 종도 있었을 것이다. 또 무기를 든 조선 의병 가운데는 “하나님 이 불의한 권세에 어찌 복종하라 하십니까”라고 울부짖으며 저항하던 열혈당원이 있었을 것이다.

이 순전한 신앙인들의 믿음의 질서, 믿음의 순종에는 하나님만이 개입할 일이다. 하나님 계획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혹여 살다 보니 부득이하게 개입해 ‘발에 먼지가 묻었다’(눅 10:11)며 최병헌 목사처럼 기도와 회개로 털어내는 자세가 참 지도자의 모습이다.

한데 현실은 정치 목사들이 ‘하나님 계획’을 내세워 야곱 구예를 만들어 가는 기독교 광장 정치이다. 히틀러에 희생된 본회퍼가 한국에서 ‘의문의 일 패’를 당하는 어처구니없는 현상도 벌어진다. 순전한 집사·권사들이 목사님에게 받았다며 ‘받은 즉시 10명에게 퍼뜨려 주세요’라는 내용의 광장 집회 독려 문자를 보내온다.

‘해 아래서 행해지는 모든 학대를 보시는’(전 4:1) 하나님이다. 그 학대 받는 자에게 위로자가 없다고 하신 하나님이다. 하나님 이름으로 자신의 의를 세우지 말고 눈물 흘리는 자에 다가가 위로자나 될 일이다.

전정희 뉴콘텐츠부장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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