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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홍인혜] 시험에 들고 난 뒤



대학수학능력시험이라는 것을 치른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하지만 워낙 강렬한 기억인지라 몇 개의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이따금 떠오른다. 깨진 유리처럼 날이 서 있던 11월의 공기라든지, 그날 내가 입었던 베이지색 패딩점퍼라든지, 사람이 한 일이 맞나 싶게 정확한 간격으로 열 맞춰 서 있던 고사장의 책상 같은 것들이 말이다.

그날 마주했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욱 또렷이 떠오른다. 우선 나만큼 긴장했던 부모님의 굳은 표정이 기억난다. 시험장 앞에서 작별하는데 열없는 가족들이라 대단한 감동의 순간 같은 것 없이 머쓱하게 헤어졌다. 그리고 응원을 나왔던 후배들도 떠오른다. 교문 앞에 빨간 볼을 하고 옹기종기 모여 서서 ‘선배님들 파이팅’을 외치고 있었다. 그 모두를 뒤로하고 낯선 교실에 가서 배정된 내 자리에 앉았다. 알싸한 긴장감이 넘실대는 가운데, 돌연 정리되지 않은 묘한 심상이 마음 바탕을 어지럽혔다. 하지만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순간이었기에 그 마음을 급히 단속했다. 수업시간에 몰래 받은 친구의 쪽지처럼 납작하게 접어 책 틈에 끼워 넣고 덮어버렸다.

어찌어찌 시험의 절반을 치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같은 고사장에 배치됐던 친구들과 모여서 도시락을 먹었다. 다들 고르고 고른 메뉴를 싸 왔음에도 아무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달다는 느낌도, 짜다는 느낌도 그 무엇 하나 ‘맛’으로 안착하지 못하고 혀 위를 어색하게 맴돌다 목구멍 너머로 사라졌다. 나는 밥을 절반도 넘게 남겼다. 친구들과 헤어져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는데 아까부터 마음에 꿈틀거리던 스산한 기분이 더욱 강렬해졌다. 줄곧 유령처럼 내 주변을 떠도는 이 감정의 정체는 무엇일까? 하지만 오늘 풀어야 할 문제는 이런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물음표를 꿀꺽 삼켰다.

마침내 모든 시험을 마치고 나를 데리러 오신 부모님과 다시 만났다. 잘 봤어? 모르겠어, 따위의 대화를 하고 외식을 했다. 집에 와서 방에 틀어박혀 채점을 했다. 내가 어디에서 실수를 했고 어느 지점에서 매양 틀리던 것을 또 틀렸구나 곱씹으며 멍하니 책상에 앉아 있는데 종일 일렁거리던 어떤 마음이 더 또렷한 형태를 갖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 마음은 고독감이었다. 나의 능력을 평가받는다는 이 거대한 사건 앞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물론 나를 염려해주시는 부모님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 새벽부터 서 있던 후배들도, 옆 교실에서 나처럼 긴장하고 있던 친구들도 있었고, 그 보드랍고 따뜻한 마음이 무의미하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개별자로, 살며 처음 마주하는 이토록 압도적인 순간 내 몫을 온전히 살아내야 하는 것은 오직 나였다. 그 결과를 마주하고 오롯이 감당해야 하는 것도 결국 나였다.

친구들도 모두 비슷한 기분이 들었던 걸까. 우리는 그날 밤 열 시쯤 동네 제일 번화한 곳에서 모였다. 일탈 비슷한 걸 하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 액세서리 가게에서 줄이어 귀를 뚫었다. 얼얼한 귀를 쓰다듬으며 그제야 시험 이야기를 나누는데 누군가는 소위 대박이 났고 누군가는 말아 먹었다. 하지만 서로 어떤 칭찬도, 위로도 할 수 없었다. 전국의 수험생들을 능력 순으로 줄 세우는 이 행사에서, 내가 올라가려면 네가 내려가야 하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서로 어떤 말을 건넬 수 있겠는가.

학창시절 내내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급식을 먹고 같은 문제집을 풀던 사이였고, 불과 어제 이 시간만 해도 다들 ‘긴장한 수험생’이라는 똑같은 처지였지만, 24시간 만에 우리는 미래의 대학생과 예비 재수생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갈림길 앞에 서 있는 것 같았고 이미 뿔뿔이 흩어진 것 같았다. 그 길은 홀로 걸어가는 길이었고 남은 평생 이어질 길이었다. 외로워서 모였는데 함께 있으니 더욱 쓸쓸해졌다. 이건 인생의 복선 같은 걸까. 나는 십대의 끝자락에서 그 사무치는 고독을 예감했다.

스티커 사진이라도 찍을까, 누군가의 제안에 좁은 부스 안에 옹기종기 모여 섰다. 알록달록한 가발을 쓰고 애써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나는 그만 눈물이 나와 버렸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 위로할 수 없는 사이였다. 나보다 좋은 점수를 얻은 아이는 으스대는 것 같아 위로할 수 없었고, 본인의 성적이 심란했던 친구는 위로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의 사진 속 우리는 모두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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