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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풍경화] 나는야 편의점 바지사장



“1100원입니다.” 자신 있게 삑― 바코드를 스캔했다. 그랬더니 헉― 계산기 화면에 1200원이 표시된다. 이게 언제 이렇게 가격이 올랐지? 옆에 있던 정욱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손님도 미덥잖다는 눈빛으로 위아래 흘겨보고는 편의점을 나간다.

다음 손님은 아싸! 바구니 한가득 먹거리를 담았다. 손님은 계산대 위에 상품을 올리고, 정욱이는 계산하기 편하도록 상품을 정렬하고, 나는 룰루랄라 핸드스캐너를 움켜쥔다. 붉은 불빛이 삐비빅― 바코드를 읽는다. 이쯤은 나도 잘할 수 있다고! 시위하듯 내 손은 ‘프로페셔널하게’ 움직인다. 그때 정욱이가 말한다. “손님, 이 제품은 2+1입니다. 저쪽 진열대에서 하나 더 가져오세요.” 아니 이 녀석은 머릿속에 컴퓨터를 심었나? 바코드를 스캔해보지도 않고 행사상품을 줄줄 외운다. 잠시 후에는 계산대 아래 있는 초콜릿 하나를 슬그머니 상품 속에 끼워 넣는다. 왜 그러나 했더니 다른 상품에 얹어주는 증정품이다. 1+1, 2+1, 가격할인, 덤 증정…. 편의점에서 진행하는 이런 행사가 한 달에만 수백 건. 정욱이는 반절 이상 외운다. 아니, 거의 외울걸? 말 그대로 ‘걸어다니는 편의점’이다. 나의 프로페셔널은 정욱이 앞에 언제나 쪼그라든다.

정욱이는 나랑 편의점에서 함께 일하는 친구다. 사업자등록증에 대표자는 봉달호로 되어 있으니 법적으로 따지자면 나는 고용인, 정욱이는 피고용인. 그러나 주위에서 아무도 나를 사장으로 보지 않는다. 정욱이가 훨씬 ‘사장님’다우니까. 점심시간 지나고 남자 손님 한 명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온다. 정욱이는 냉큼 담배 한 갑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는다. ‘맞죠?’ 하는 눈빛으로 정욱이가 미소짓고 손님도 빙그레 웃으며 나간다. 나는 옆에서 멍하니 구경하고 있을 뿐. 정욱이가 그렇게 담배를 외우는 손님이 족히 수십 명에 달한다. 이 녀석은 일 마치고 집에 돌아가 ‘깜지’를 쓰는 것일까? 정욱이 흉내 내려고 나도 미리 담배를 꺼내 놓았다 망신을 당한 적 여러 번이다. 오후 늦게 어린이집 꼬마 손님들이 몰려온다. “재준아, 할머니가 그건 이빨 ‘아야’ 한다고 먹지 말래.” “우리 유민이 키가 많이 컸구나!” “어머니, 민찬이 초등학교 잘 다니죠?” “승윤이는 감기 좀 나았어요?” 이쯤 되면 누구 집 찬장에 밥그릇이 몇 개 있는지, 정욱이는 분명 알고 있을 것만 같다.

편의점 점주의 주요 업무 가운데 하나는 구인광고 올리는 일이다.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진상이나 왁자지껄 가게를 휘젓고 떠나는 초중딩에게 받는 스트레스보다 몇십 배 신경 쓰이는 과업은 역시 직원 다루는 일이다. 채용하고 가르치고 ‘내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 점주의 큰 재간이다. 때로 앞타임 근무자와 뒤타임 근무자가 티격태격 다투는 경우가 생기는데, 평화의 전도사가 되어 “양측 화해하세요” 하는 역사적 합의도 점주의 몫이다.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알바생을 어르고 달래는 사건은 다반사로 일어나고, 다음 사람 구할 때까지 며칠만 기다려 달라고 싹싹 빌어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생에 나라를 구한’ 행운을 갖고 태어난 편의점 주인장이다. 정욱이가 있고, 사장보다 사장답게 일하는 직원들이 있으니, 오늘도 나는 그들만 믿고 칠푼이 바지사장처럼 칠렐레팔렐레 살아간다. 연말 ‘임금 협상’을 앞두고 공개적으로 이렇게 편의점 식구들에게 애정을 표하는 일이 그나마 내가 가진 유일한 재주다. 직원 여러분, 고맙습니다. 내년에도 잘 부탁드려요. 알러뷰!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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