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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재 기자 성기철의 수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이수성 총리의 반말 호명 기억… 김춘수의 ‘꽃’이 묘사하는 의미
이름 불러줘야 들꽃이 장미 돼… 호감 사는데 가장 손쉬운 방법


20년도 훨씬 더 된 얘기다. 정치부 기자로 국무총리실을 담당하게 돼 ‘신고’를 했다. 정부 광화문청사 총리 집무실에서 몇몇 신규 출입 기자들과 함께 이수성 당시 총리와 면담하는 상견례. 그날 점심식사 후 청사로 들어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서 간부 서너명과 함께 식사하고 들어오던 이 총리를 딱 마주치게 됐다.

짧은 대화 한 토막. “어어 기철이 점심 뭐 먹었나?” “아 예. 저는 근처에서 비빔밥 한 그릇 했습니다만.” “그랬구나. 나는 이 사람들하고 ○○칼국수 갔었어. 국수집에서 만났으면 내가 점심 샀을 텐데.” “예 감사합니다. 다음에 총리님 또 ○○칼국수 가신다는 정보 입수되면 따라가서 옆자리에 슬쩍 앉겠습니다.” “그래, 맞아. 그렇게 해서 점심값 아껴야지.”

‘일인지하 만인지상’ 총리가 젊은 기자 이름을 정확히 기억했다가 다정하게 불러준다. 출입처에서 ‘○ 기자’라 부르는 통상적인 호명 대신 성도 없이 반말 투로 이름만 불러 친밀감을 돋운다. 그 짧은 시간에 부드러운 농담까지 섞는다. 이 장면, 사진으로 치면 한참 빛이 바랬겠지만 내겐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특유의 친화력에 대한민국 대표 마당발로 소문난 이 총리의 이런 모습이 내겐 작지 않은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누군가에게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에게서 이름이 불린다는 것, 둘 다 참 중요한 것 같다. 가장 손쉽게 관심, 친밀감, 나아가 사랑을 표현하거나 확인할 수 있는 방법 아닐까 싶다. 이름 부르기를 이웃한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한 사랑의 열쇠라 해서 틀리지 않을 것이다.

김춘수의 명시 ‘꽃’은 이름 부르기의 참뜻을 명징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맞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분명 무의미한 존재다. 하지만 이름을 불러주는 순간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나 역시 나에게 걸맞은 이름이 그에게 불림으로써 의미 있는 존재가 된다. 누구든지 이름이 불림으로써 남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존재로 말이다. 학교 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꽃병을 보고 이런 시상이 떠올랐다니 젊은 시인의 영감이 놀랍다.

이름. 나의 것인데도 나보다 남들이 더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이름은 나를 정의해주지만 남들이 불러주는 목소리와 표정, 느낌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다가온다. 혹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자녀에게 괜히 “○○야”라고 불러본 적이 있는가. 아이가 “예 여기 있어요, 왜요”라고 대답할 때 “그냥”이라고 말해본 적이 있는가. 말 그대로 딱히 할 말이 없음에도 마냥 사랑스럽고 행복해서 그냥 불러보는 상황 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

천안함 피격사건 추념 행사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희생 장병의 이름과 계급을 일일이 호명하고, 세월호 침몰사고 추도식에서 이낙연 총리가 미수습자 이름을 하나하나 부른 것은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지 못한데 대한 죄스러움과 반성의 표현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이런 연설 화법을 즐겨 사용한다. 비록 유명을 달리하지만 그들과 함께하며 소통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그래서 유가족과 듣는 사람 모두 감동한다.

애완견에게 이름을 지어 불러주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 싶다. 비록 동물이지만 가족처럼 여겨 수시로 대화하고 특별히 대하겠다는 애정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이 주요 생활용품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것도 같은 이치일 게다. 승용차는 ‘빠삐스키’, 자전거는 ‘하늘이’, 로봇청소기는 ‘웅(雄)이’, 공기청정기는 ‘숙(淑)이’, 곰 인형은 ‘눈이’라 부른다. 재미삼아 지어 부르는 이름이지만 나름 각별한 의미와 스토리를 담고 있다.

데일 카네기는 명저 ‘인간관계론’에서 남에게 호감을 사는데 이름을 기억했다가 불러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호의를 얻을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자명하고 중요한 방법 중 하나가 이름을 기억하고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중략)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황제로서 해야 했던 그 많은 일들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만났던 모든 사람의 이름을 기억할 수 있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 (중략) 상대방의 이름은 그에게 있어 모든 말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중요한 말로 들린다는 점을 명심하라.”(임상훈 옮김)

직장에서 데면데면 지내는 젊은 직원들에게 먼저 다가가 다정하게 이름이라도 불러주는 선배가 되고자 다짐하지만 그게 잘 안 되는 이유는 뭘까. 여유가 없어서이기도 하겠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잘못이 더 큰 이유이지 싶다. 나이 탓인지 평소 부르던 이름이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이를 어쩌나. 매일 이름 암송시간을 가져야 하나 싶기도 하다.

누구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각자 피어난, 하찮은 들꽃일 뿐이다. 그래서 남남이다. 평생 들꽃으로 머물 것인지, 화려한 장미로 거듭날 것인지는 자기 하기 나름이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장미가 되기 위해서는 이름을 불러주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성기철 경영전략실장 겸 논설위원 kcs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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