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대통령 전면 사진, 정부 정책 홍보 내용 실린 건 독재정부에나 가능한 일 아닌지
올해 새 학기부터 고교생들 책상에 놓일 한국사 교과서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파격적인 대접을 받았다. 씨마스 출판사가 내놓은 한국사 교과서 318쪽에는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악수 장면이 실려 있다. 가로 21㎝ 세로 28㎝ 크기인 두 정상의 사진은 페이지 전체를 가득 채운다. ‘청와대 홍보물’을 연상시키는 편집이다. 역대 대통령들은 물론이고 김구 안창호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이회영 같은 내로라하는 위인들도 한국사 교과서에서 이런 예우를 받지는 못했다.
한국사 교과서들은 문 대통령을 보수 정권이 망쳐놓은 남북 관계를 복구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씨마스 출판사는 “고조되던 한반도의 긴장은 2018년 문재인정부의 노력으로 큰 전환점을 맞았다”라고, 동아출판은 “문재인정부가 들어서며 남북 관계는 전환점을 맞았다. 문재인정부가 제시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화해 협력 방안에 북한이 호응”이라고 설명한다.
지학사는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문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사진을 늘어놓고 “문재인정부 출범 후 북한과 잇따라 정상회담을 개최하였고, 한반도 평화를 다지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비상교육은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나란히 걷는 사진으로 한 페이지의 절반을 채우고는 “남과 북의 두 정상과 많은 사람이 이곳에서 통일을 이야기하였다”고 설명했다. 사진에서 문 대통령은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김 위원장은 경청하고 있다.
동아출판은 ‘북한 사회의 변화’ 단원에서 “문재인정부가 집권하면서 남북 관계가 개선되자 경의선 동해선 철도 연결 재개, 개성공단 재가동 등 경제협력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고 썼다. 현재 남북 관계와 간극이 상당하다.
이명박·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은 남북 관계의 훼방꾼처럼 그려 놨다. 남북 갈등의 원인을 금강산 관광 금지나 개성공단 폐쇄 같은 보수 정권의 대북 강경책에 방점을 찍어 설명한다. 금강산 관광에 나선 50대 주부가 북한 초병의 총격에 사망했지만 북한은 사과는커녕 재발 방지 약속조차 하지 않았다고 설명한 교과서는 없었다. 46명이 숨진 천안함 폭침을 언급하지 않거나 ‘침몰’ 내지는 ‘사고’라고 언급한 교과서도 있다.
문 대통령 집권 덕에 보수정권에서 망친 남북 관계가 복원되고 남북이 화해와 협력으로 나아가는 중이라고 쓰고는 “이제 우리(학생)는 남북통일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묻는 교과서도 있다. 역사 수업만으로도 집권 세력 입장에선 훌륭한 선거운동 아닐까.
문 대통령의 ‘소득주도 성장’도 등장한다. 씨마스 한국사의 사회 양극화를 설명하는 단락을 보면, “노동시장 양극화에 따라 중산층이 감소하고 저소득층 비중이 높아졌다. 게다가 가계 소득이 더디게 증가하여 소비에 지출할 여력이 없어졌다”고 운을 띄운다. 그리고 “최근에 이를 사회 안정과 통합을 가로막는 사회 문제로 인식하고, 경제 민주화를 고민하거나 ‘소득 주도 성장’으로 바꾸려는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한다. 외환 위기와 시장 개방에 따른 고통스러운 상황을 앞세워 설명하고는 해법으로 문 대통령이 강조하는 경제민주화와 소득 주도 성장을 등장시키는 방식으로 쓰고 있다.
박근혜정부가 만들었던 국정 교과서도 박정희 전 대통령을 꽤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독재와 인권 탄압보다는 산업화 공로를 부각했다. 그러나 현직 대통령을 대놓고 띄우지는 않았다. 국정 교과서는 “2012년 12월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었다. 국민행복, 희망의 새 시대를 표방하며 국정을 시작했다”라고 두 줄 언급했을 뿐이다. 박 전 대통령 사진은 한 장도 나오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국정 교과서가 추진될 당시 “독재 미화”라고 비난했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박근혜 대통령의 효도 교과서”라고 일갈했었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학생이 배우는 교과서로 최고 권력자나 그의 정책을 홍보하는 일은 독재정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권위주의 시대 이후 역사 교과서에서 현직 대통령의 전면 사진이 실린 예를 기자는 본 일이 없다. 문 대통령은 페이지 한가득 자신의 모습이 실린 역사 교과서를 보고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국정 교과서 폐기하고 새 교과서를 만들라고 직접 지시했던 당사자로서.
이도경 사회부 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