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책은행장 모두 친문 인물로 채워넣는 등 보은인사 천지
야당 때 극렬 반대하다 180도 입장 바꾼 ‘내로남불’ 행태
임기 도중 선거판으로 달려간 공공기관장 자리도 총선 낙천 낙선자들에게 대물림될 듯
‘국제통화기금(IMF) 시니어 이코노미스트, 재정경제부 국제금융국장,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실 비서관, 기획재정부 1차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
‘기획재정부 경제정책국장, 청와대 경제금융비서관, IMF 상임이사, OECD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 청와대 경제수석.’
관료 출신 두 사람의 이력이다. 누가 더 나은지 알 수 있는가. 경력이 엇비슷해 판별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누구는 안 되고 누구는 된다고 한다. 기업은행장 낙하산 인사를 둘러싼 논란이다. 전자는 2013년 기업은행장으로 내정됐다 야당이던 민주당 반발로 낙마한 허경욱 전 기재부 차관이고, 후자는 노조 반대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가 지난 2일 임명을 강행한 윤종원 기업은행장이다. 10년간 이어진 내부 승진 전통을 깨고 고공낙하한 윤 은행장은 노조의 육탄방어로 20일째 본점 집무실로 출근하지 못하고 있다.
“자격이 미달하는 인사라면 모르겠으나 경제·금융 분야에 종사해 왔다. 우리 정부에서는 청와대 경제수석을 했다. IMF 상임이사도 역임했다. 경력 면에서 전혀 미달되는 바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4일 신년기자회견에서 기업은행은 정부가 출자한 국책은행으로 인사권이 정부에 있다고 일축하면서 한 말이다. 하지만 7년 전 민주당이 반대했을 때와는 180도 바뀐 입장이어서 설득력이 없다. 자기모순,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다.
허 전 차관 내정 당시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주당 의원들이 발표한 성명을 다시 보자. “관치는 독극물이고 발암물질과 같은 것이다. 능력을 인정받고 있는 내부 출신 인사를 내치고 모피아(옛 재무부 출신 관료)를 낙하산으로 보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관치금융의 폐습이라며 이렇게 주장했던 지금의 더불어민주당은 꿀먹은 벙어리다. 기업은행 노조가 두 사람 이력을 비교하며 누가 적임자이고 누가 낙하산이냐며 정부의 일관성 없는 원칙을 비판한 것이 오히려 공감이 간다. 21일 위원장 선거를 끝낸 상급단체 한국노총이 이 사태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태세여서 판이 커질 전망이다.
현 여권은 이명박정부 시절 대통령 모교 출신과 핵심 측근인 ‘4대 천왕’이 금융 권력을 휩쓸 때나, 박근혜정부 시절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인맥이 금융계를 장악했을 때 낙하산 인사를 강력 비판한 바 있다. 2013년 서금회 멤버로 산업은행 회장에 오른 홍기택씨는 자신이 낙하산임을 인정하고 “성공한 낙하산이 되겠다”고 다짐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부총재로 옮긴 뒤 ‘대우조선해양 지원 당시 산은의 들러리 역할’을 고백한 인터뷰 논란으로 돌연 사퇴해 국제적인 망신을 자초하며 몰락했다. 낙하산 인사 폐해의 대표적 사례다.
문재인정부는 이전 정권의 구태를 반면교사 삼아야 했는데 국정철학을 내세우며 스스로 원칙을 무너뜨렸다. 2017년 대선 때 문 후보 측이 금융노조와 맺은 ‘낙하산 인사 근절’ 정책협약은 거의 휴지조각이 됐다. 과거 정부와 똑같이 명분없는 논공행상의 낙하산 인사를 되풀이하면서 공공기관장을 나눠먹고 있으니 말이다. 이번 윤 은행장의 가세로 이동걸 산은 회장, 방문규 수출입은행장을 포함해 3대 국책은행장이 모두 친문 인사로 채워졌다. 신관치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란의 불씨는 한국예탁결제원으로 옮겨붙었다. ‘관(官) 출신 낙하산’을 반대해온 노조를 비웃듯 예탁결제원 후임 사장에도 금융위원회 출신인 이명호 민주당 수석전문위원이 내정된 것으로 전해져 노조와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기업은행 계열사의 낙하산 인사설도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낙하산 인사는 금융권에 국한하지 않는다. 이들이 공공기관을 이끌 전문성과 경영 능력 등을 갖췄다면 혹여 모르겠으나 함량 미달이 많다는 게 문제다. 그래도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기관장들이 본업을 충실히 해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다면 나름대로 역할은 했다고 볼 수 있다. 한데 무책임하게 임기 도중에 너도나도 선거판으로 달려가고 있으니 후안무치가 따로 없다. 4·15 총선 출마를 위해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국민연금공단·교직원공제회·대한지방행정공제회 이사장, 한국도로공사·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 한국문화정보원·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등이 줄사표를 내고 중도 하차했다. 기관장 재직 시 잿밥에만 눈독을 들였으니 업무와 민생은 뒷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출마할 지역의 행사에 자주 나타나거나 명절 선물을 돌려 논란을 야기한 이들도 있다. 공직은 총선용 스펙에 불과했다. 국민을 우습게 아는 처사다.
문제는 공석이 된 자리가 다시 낙하산으로 대물림된다는 점이다. 총선 전후로 여권의 총선 낙천자 또는 낙선자들이 나오면 이들에게 한 자리씩 챙겨줘야 한다. 한둘이 아니라서 돌려막기 보은인사를 위해 공수부대가 꾸며질 게다. 이것도 적폐인데 청산이 안 된다. 정권이 바뀌어도 좀처럼 고쳐지지 않는 고질병임에 틀림없다.
논설위원 jt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