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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자기연민의 시대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주인공 리키는 택배기사다. 다니던 건설회사가 금융 위기로 파산하는 바람에 3D 업종을 전전하다 친구의 권유로 택배기사 일을 하게 된다. 리키는 힘겨운 노동을 하고 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아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다고 했다. 지금은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연결되다 보니 도소매업이 점점 몰락해가면서 택배만 성업 중이다. 그러나 택배 업무마저도 곧 인공지능(AI)에 빼앗길 것으로 보인다.

현재 미국 내 110개의 창고, 45개의 분류센터 및 50여개의 배송 스테이션을 운영하는 아마존에는 12만5000명의 풀타임 근로자가 일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전 세계에 있는 자사의 물류창고에서 10만대 이상의 로봇 직원을 활용하고 있는 아마존은 드론을 이용한 제품 배송 등에도 투자하는 등 무인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만약에 아마존이 완전 무인화를 이룬다면 인간은 모두 해고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기술의 발달은 실업을 낳고 있다.

AI가 단순노동을 모두 처리하는 세상이 되면 인간은 불행할까. 아닐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단순한 일은 비서로 고용한 AI에게 맡기고 인간은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창의적인 일만 하면서 자유롭게 사는 세상이 올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한다. 인류 5000년의 역사에서 인간이 기술에 완전히 종속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이번에도 가능할 것이다.

과거에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정규직이 보장되는 안정된 직장에 취직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둘쯤 낳고, 집과 자동차를 마련하고, 은퇴한 뒤에는 연금으로 살아가는 어떤 확실한 삶의 모델이 존재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세계를 하나로 만들어버린 초연결사회가 된 이후 획일적인 행복의 롤 모델은 완전히 사라졌다. 가족이나 직장이라는 방패마저도 사라지다 보니 개인은 저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론을 터득해야만 한다.

무조건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은 세상의 상식마저도 바꾸고 있다. 총선을 앞둔 정치판에서는 ‘스펙 공천’이 아닌 감동적인 삶을 산 인재를 발굴해 추천하는 ‘스토리 공천’을 경쟁적으로 벌이고 있다. 연예계에서는 뒤늦게 천재성을 인정받는 ‘리베카’의 가수 양준일이 데뷔 30년 만에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눈물겨운 사연을 가진 이들이 경연을 벌이는 ‘미스터트롯’이나 ‘보이스퀸’의 인기도 폭발적이다.

출판시장에서는 엘리트 지식인이 무미건조하게 던져주는 평범한 지식이 아닌 특별한 삶을 통해 터득한 지혜(지성)를 안겨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여야 주목을 받는 세상이 됐다. 소설시장에선 ‘82년생 김지영’(조남주, 민음사)이나 ‘일의 기쁨과 슬픔’(장류진, 창비)처럼 저마다의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생활 에세이형’ 소설이 상한가를 치고 있다. 아무리 유명한 저자라도 새로운 감동을 안겨주지 않으면 곧바로 외면받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흐름이 벌어지는 것은 빅데이터를 즉각 확인할 수 있는 기술발달에 힘입은 바가 크다. 또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듯한 삶에서 쉽게 헤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기고 측은지심을 발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가히 숨겨진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존중받지 못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바로 자신인 것처럼 여기는 자기 연민의 시대라 할 수 있다.

크라우드펀딩의 후원자들은 단순히 가성비를 따지거나 소유를 위해 후원하지 않고 창조적인 시도를 귀하게 여기고 가치 소비와 취향 투자에 공감하는 일이 일반화되고 있다. 이런 흐름이 출판 시장의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마저 무너뜨리고 있다. 인간이 존재가치를 잃어가는 세상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선인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죽으라는 법은 없다고 말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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